바이러스는 무죄?

2 years ago by in Thought

– 병은 인간이 만들고 욕은 바이러스가 먹는다

도연명| 출판인, 본지 편집위원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은 흑사병도 콜레라도 아닌 독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5천만에서 1억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전투로 인한 사상자 수의 몇 곱절에 달한다. 이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1976년 다시 귀환했을 때 많은 의학자들이 난리 법석을 떨었지만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페인 독감의 파괴력은 바이러스의 유전적 특성이 아닌 환경(지리하게 이어진 참호전과 부족한 의료시설)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억울하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이 친구들도 우리처럼 환경운동 비슷한 걸 한다. 인간들이 환경운동을 하는 이유는 하나뿐인 지구가 병들고 있기 때문 아닌가? 달 근처에 지구 비슷한 별이 한두 개만 더 있어도 환경운동이 지금처럼 대접 받진 못했을 것이다. 한두 개가 아니라 3, 4십 개가 더 있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환경운동가들은 전업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인간으로 치면 로켓을 타고 새로운 별로 이주를 일삼는 최첨단 유목민들이다. 이들이 무수한 난관을 뚫고 정착에 성공하면 사람은 환자가 된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는데 환자가 꼼짝 못하고 사경을 헤맨다면 바이러스도 난감해진다. 이 환자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수다도 떨고 연애도 해야 로켓을 다시 띄워 볼 수 있는데 외계로의 진출은커녕 공멸하게 생긴 것이다. 정착지의 개발을 한 템포 늦추고 환경(숙주가 된 사람)을 돌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처럼, 햇볕도 안 들어오고 세숫물 한 방울 얻을 수 없고, 굶주림과 피곤에 절은 인간만 바글바글한 공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로켓을 타고 30분만 가도 지구와 똑같은 별이 여남은 개씩 나오는 상황이다 보니 ‘소중한 환경’이 졸지에 ‘얼어 죽을 환경’으로 전락을 하고, 환경운동가들이 모조리 삽을 든 개발의 역군으로 변신을 했다. 결국 그렇게 5천만이 넘는 목숨이 ‘개발’을 당한 것이다.

흑사병은 어떤가. 이 경우 쥐벼룩이 바이러스를 실어 나르며 로켓의 역할을 한다. 이 로켓은 속도와 기동력이 뛰어난 반면, 용량이 작은 단점이 있다. 집단 이민을 하려면 한두 마리론 어림없고 무수히 많은 벼룩이 있어야 한다. 흑사병이 기독교권에서만 기승을 떨친 이유가 감이 잡히지 않는가? 당시 기독교는 음욕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목욕을 죄악시하였다. 역 앞의 택시보다 많은 로켓이 머리털과 옷가지에 우글대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기독교 문화였던 것이다. 기아가 발생하면 사람들의 면역력이 떨어지고 바이러스를 가득 실은 쥐벼룩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산천을 휘젓고 다녔다.

19세기 인도에서 처음 등장한 콜레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상하수도가 부실한 상태에서 공장이 들어서거나 인구가 증가하면 (혹은 인도처럼 강물에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이 있다거나 상수원에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다거나 하면) 수질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식수를 통해 영생을 보장받은 설사병균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광란의 질주를 시작한다. (물론 지금은 원래의 평범한 균으로 돌아간 상태다.) 이쯤 되면 로마가 그토록 강성했던 이유도 눈치 챌 수 있다. 로마인은 어딜 가든 목욕탕부터 세우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수백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로마의 수도관은 19세기의 런던보다 오히려 20세기의 뉴욕에 가까웠다. 병원도 예방접종도 없었지만 로마는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 이렇다 할 전염병을 모르고 살았다.

결론적으로 병원균 자체가 어떤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따라 치명적인 독성을 띠기도 하고 유순해지기도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환경을 도외시하고 병원균에만 초점을 맞추면 부적절한 대응이 다반사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불행하게도 현대의학이 바로 그런 길을 걷고 있다.

 

백신의 경우

유아 백신이 자폐증의 원인이라는 괴소문이 나돌고 있다. 발단은 한 의사의 논문이었다. 이 의사는 왕따를 당하다 결국 면허가 박탈되었고, 의료계는 근거 없는 낭설이란 판결을 내렸지만, 백신에 대한 불안감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중이다. 백신에는 기준치의 수십 배를 초과하는 수은이 들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기준치’란, 참치 캔 속의 수은 함유량 같은 걸 의미한다. 혈관에 맞바로 쏟아 넣는 수은과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불행하게도 ‘주사되는 수은량’의 기준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위험성이 제대로 연구된 일조차 없다. 성인이 평생에 걸쳐 노출되는 수은량의 대략 절반 가량이 백신을 통해 아이들의 몸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별 일 아니라고 넘어가도 좋은 걸까?

백신을 가장 열심히 접종하는 미국은 영아사망률이 선진국 중에 가장 높다.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유럽은 도리어 사망률이 낮고, 일본은 양쪽을 왔다 갔다 했는데 영아사망률 또한 그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쯤 되면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받았을 법도 한데 백신의 부작용을 연구하는 학자는 느닷없이 연구실이 폐쇄되고 날벼락처럼 해고를 당하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당국의 승인을 기다리는 백신들이 줄지어 대기 중인 상태다. 백신이 일단 채택되면 돈방석에 앉기 때문에 너나없이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반면에 사망률이 제로인 상태로 반세기가 지난 병들의 백신은 아직도 끈질기게 접종이 되고 있다. 결국 접종 횟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많이 맞아도 되는 건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백신은 1만 개를 접종해도 아무 문제 없다’는 내용의 글이 전문가의 이름으로 버젓이 발표되기도 한다. 이런 추세라면 백신의 종류는 앞으로도 점점 늘어날 것이 분명하고, 백신과 함께 몸 안으로 들어올 수상한 물질의 양도 그에 비례해 증가할 것이다. 여기서 약간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백신이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걸까?

 

의심스러운 신화

1940년대에 예방접종이 시행되고 나서 디프테리아 사망률은 무려(?) 10분의 1로 감소됐다. 하지만 디프테리아로 인한 사망률은 그 전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 수가 20세기 초반 40명 수준이다가 백신이 나오기 직전까지 1.2명으로 줄었으니까. 백신 접종이 시작된 뒤 이게 다시 0.1명으로 준 것이다. 이 결과를 놓고도 백신이 디프테리아를 막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병들도 마찬가지다. 백신의 위대함을 찬양하는데 단골처럼 언급되는 병이 천연두인데, 백신이 천연두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영국에서 접종이 강제 시행된 때가 1867년이지만 사상 최악의 천연두는 그로부터 3, 4년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신은 꺼져 가던 천연두의 불씨를 오히려 되살리는 데 일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연두는 백신이 없어도 자연 소멸됐을 가능성이 높다. 백신이 아예 없거나 보편화되지 못한 장티푸스와 콜레라, 성홍열 등이 비슷한 길을 걸었듯이.

전염병이 줄어든 1차적 원인은 환경(특히 영양상태)의 개선에 있다. 19세기 이래 유럽의 사망률은 백신의 등장과 무관하게(마치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을 못하는 것처럼) 감소를 거듭해 왔다. 환경이 세균이나 바이러스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가 있다. 인구의 100%가 예방접종을 받는 호주 원주민들은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일반인의 15배를 넘는다. 칼로케리노스(Archie Kalokerinos)라는 의사가 자신의 원주민 구역에서 예방접종을 시작한 뒤 아동 사망률이 50%까지 치솟자 접종을 멈추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대신했고, 사망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그 의사는 자신의 경험을 <Every Second Child>라는 책으로 냈지만 보건당국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아프리카 감비아는 1967년 인구 대부분이 홍역 백신을 맞았고 세계보건기구에서 홍역 퇴치 선언까지 했던 나라다. 그러나 10여년 뒤 조사를 해 보니 전체 인구의 13%가 그해 홍역에 걸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중 15%가 사망했다(홍역은 정상적인 환경에서의 사망률이 0.05%에 불과하다.).

 

의학의 불길한 미래

이 홍역이 선진국에서 다시 유행하고 있다. 자폐증 괴담으로 인해 백신의 접종을 꺼리는 부모들이 늘었고, 그래서 홍역이 다시 발생하게 됐다는 것이 의료계의 진단이다.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백신이 바로 홍역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홍역 백신 접종이 시행된 이후 발병의 양상 자체가 변했다는 것이다. 예전엔 5~10세 아이들이 주로 걸리는 가벼운 질환이었지만, 지금은 주로 1세 미만의 영아들이 걸리는 위험한 병이 됐고, 백신을 접종한 성인들이 다시 홍역에 걸리는 일도 갑자기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이 백신의 부작용이라는 얘기다.

어느 쪽 말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단지 의학의 주류 이론이란 이유만으로 손을 들어주는 일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의학 논문이 얼마나 수상한 과정을 통해 양산되는지는, 미국의 역사가인 클리퍼드 코너가 2005년에 낸 <과학의 민중사>에 잘 설명되어 있다. 돈만 있으면 어떠한 내용의 논문도 ‘제작’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오죽하면 권위 있는 의학 전문지 <랜싯>의 편집자가 의학 논문을 “과학의 옷을 입힌 마케팅 전략”이라고 폄하했겠는가. 설령 마케팅이 아니라 해도, 대증 치료에만 집착하는 현대 의학의 관점 자체가 편향된 것일 수 있다. 의학이 인간의 건강에 오히려 해를 입힌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2011년에 구제역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은 뒤 대대적인 예방접종을 실시하며 대비에 만전을 기해 왔다. 그러나 구제역은 4년 만에 다시 대유행했다.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백신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란 것이 관계자들의 변명이었다. 과연 그럴까? 공장형 축산은 가축들에게 끔찍한 생존 환경을 강제한다.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에 무력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인데도, 백신만 맞히면 그만이라는 발상부터 문제가 있다. 게다가 어떤 병원균이 4년 만에 변종이 되어 접종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면, 결국 백신의 방어벽이란 것이 환경의 역습 앞에 언제든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백신의 효과란 것이 처음부터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지금 가축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불길한 현상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불경기와 빈부격차, 가공식품 위주의 그릇된 식습관(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음식을 조리할 시간이 부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등으로 인간의 면역 체계는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다. 한때 퇴치된 것으로 여겨졌던 결핵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이 좋은 예이다. 설상가상으로 수익에만 눈이 먼 제약회사들이 부적절한 의학 원리를 도그마라도 되는 양 떠받들고 있다. 이 와중에 의료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어, 미국의 경우 의료보험이 국가의 재정마저 흔들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도 건강보험료가 점차 상식을 벗어난 선으로 청구되고 있다. 이런 부조리한 현상들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지속된다면, 백신이 전혀 듣지 않는 질병이 속속 등장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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