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무교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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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개벽신문 46호(2015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무교회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무교회주의 

김대식| 함석헌 평화포럼 공동대표,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타락이다.” 함석헌의 말이다. 종교나 모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종교의 이름이나 조직을 거부하고 그가 말한 새 종교라는 것을 지향하려고 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종교는 타자에게 있는 것도 외부적 강제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의지와 신앙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리라. “나를 살리는 내 신앙은 내게 있다”는 말이 이를 반증한다. 타자에 의해서 규정된 혹은 일정한 권위에 의해서 규칙화된 종교는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학습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형성하는 신앙이 아니라 타자나 조직의 권위와 틀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가지게 되는 타율적 종교가 되는 것이다. 함석헌이 우려했던 바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결단, 그리고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주체적으로 신앙을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화되는 종교는 결국 고착화되거나 획일화되는 종교관을 습득하게 된다.

종교의 역동성과 생동성, 그리고 생성성을 상실하게 되면 종교는 썩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조직화된 종교는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타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내부적으로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폭력적인 공동체로 변한다. 그는 대담하게도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무교회주의라고 하는 것도 버리면서까지 더 본질적인 종교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쳤다. 나의 종교라고 해서 카오스적인 종교나 남발하는 종교적 관념을 일컫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나의 종교란 주체적인 종교, 인간 개별자의 의식을 가지고 결단하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종교를 통해서 신을 만난다는 것은 조직, 체계, 체제를 통해서 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을 넘어서 각 개별적인 존재에게 현존하는 신을 체험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교의 이단자가 되노라 하는 것도 참 그리스도교적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요, 무교회를 내놓는다는 것도 더 무교회적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가 무교회마저도 버리려고 했던 것은 무교회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착화된 진리를 유연성을 가진 진리로 탈바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리스도교를 버린 것도, 무교회를 버린 것도 아니다. 버린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간 종교를 취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는 진리라고 하는 바탈을 어떻게 깨달으며 구현할 것인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천착하는 종교, 진리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이다. 함석헌 자신이 종교의 경계선상에 있는 것처럼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종교적 진리의 본질을 더 강하게 체현하고 궁구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병폐는 종교 그 자체의 근본과 본질에 대한 물음을 거의 묻지 않는다는 점과 설령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에 부합한 행위로 방향을 전환하는 동력을 상실했다는 점에 있다. 함석헌은 이미 제도적, 전통적, 체제적, 조직적 종교가 가진 한계와 난점을 간파한 것이다.

함석헌이 무교회와 탈무교회, 그리스도교와 탈그리스도교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것도 그러한 기성 종교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의 추구, 즉 외형과 형식에 한정된 종교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일치하는 종교, 인격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종교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그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유보되어야 마땅하다. 초월자와 인간의 인격이 일치하고 합일하려는 것이 종교의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니던가. 그렇다면 경계선은 불안하고 위험한 임계점을 나타내는 정신적, 영성적 위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교의 본질을 향한 새로운 노정으로의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봐야 한다. 사실 그 임계점에 서 있는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자들로부터도 비난의 화살을 받았던 것 같다. 그의 신앙적 순수성과 본질을 향한 열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교회주의조차도 이름이고 이미 이름이 붙여진 또 하나의 조직이라면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생명적이고 생성적이지 못한 조직을 표방하는 이름을 붙이기를 꺼렸다. 한 단체나 공동체에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이름에 해당하는 정체성으로 인해서 타자와는 엄격하게 구별되면서 차별화된다. 구별하기 위한 것이 오히려 차별과 배타성을 갖게 되고, 그 조직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교리와 체제적 변론만이 진리인 양 치부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 다. 본질과 비본질이 역전되고 와해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종교의 진리는 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지 그 자체로 살아가야 할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헌은 “조직이 무거워지면 정신은 죽는다”고 말했다.

정신의 사유함이 없는 종교는 인간의 실천적 행위가 없는 믿음‘만’, 기도‘만’, 금식‘만’ 등을 내세우면서 이상심리적 신앙인을 양산한다. 반면에 이 세상에 가변적인 것들에 ‘만’을 붙이는 것은 감성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겠으나 실제로 이상세계, 신앙세계에서는 하느님에게만 그야말로 ‘만’을 붙일 수가 있다. 어떤 형태로든 감성세계에서 유한한 인간의 행위 형태로서의 성령‘만’, 성서‘만’, ‘면죄부’만을 가지고서는 자칫 인간의 마음을 도덕적으로 거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건전한 종교는… 믿음과 영적 경험을 가르치지만 그것과 아울러 엄격한 도덕적 실천을 명하기를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신을 죽게 만드는 불건전한 종교가 사회적 해악을 가지고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에 건전한 종교는 종교의 본질로서의 도덕적 인간, 도덕적 현실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도덕적 현실과 도덕적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이름 붙인 건전한 종교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함석헌은 이를 완전히 반대하지 않는다. 불건전한 종교, 다시 말해서 반도덕적 종교, 반인격적 종교, 병리적 종교에 반하여 대항할 수 있는 이름 붙인 건전한 종교는 자신에게 합당한 이름을 내세워 그에 걸맞은 행위들을 펼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 병적인 여러 종교와 싸워 건전한 상식적인 도덕적 성격을 민중 속에 세우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종교는 현실을 잊어버림이 아니다. 현실을 건지는 것이다. 현실을 건지기 위해 가장 작은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 도덕적 종교의 마지노선을 무교회주의에 두고 있는 듯한 발언이다. 현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종교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종교는 반드시 도덕적 인격, 도덕적 성격을 드러내는 종교이어야만 한다. 건전하고 상식적이며 도덕적인 종교가 민중을 위해서 마련될 때 민중과 민중이 처한 현실이 구원될 수 있다. 종교가 도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가 도덕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완전한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종교의 현실 혹은 실재가 도덕이 되어야 하지, 역으로 도덕이 종교의 현실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오늘날 종교가 그러한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의 알맹이 역할을 하는 도덕을 외면하고 있다. 함석헌의 도덕적 종교가 다시 한 번 요청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마다 이름을 붙인 종단들이고 역사성을 띤 종교들이지만 거기에 준하는 도덕성을 내포, 전제하고 있지 못하다면 종교의 사회적 설득력은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가 사회의 도덕화에 기여하기는커녕 사회의 도덕화에 걸림돌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이태하,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 2000, 95쪽). 그야말로 이름값을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함석헌은 그 사회적 현실과 종교적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현실을 도덕으로까지 상승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엿볼 수 있는 것인데, 그 역할을 바로 건전한 종교, 어쩌면 체제나 유지하기 위해서 급급한, 교리나 고수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종교가 아닌 본질적인 종교, 더 본질적인 종교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종교는 무교회라고 꼬리표가 붙은 종교보다도 더 본질적인 종교인 것은 확실하다(함석헌, 함석헌전집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한길사, 1983, 135-14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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