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동학연구회 동학기행 세 번째 , 경북 예천

2 years ago by in History, 동학과 생명

​​​​​​## 이 글은 개벽신문 46호(2015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정지창| 전 영남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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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문 장군 묘소

한 달에 한 번씩 떠나는 대구 동학순례단의 세 번째 행선지는 경북 예천이다. 이번에는 대구에서 6월 28일(일요일)에 8명(추연창, 김창환, 방상언, 이한옥, 정연하, 강기룡, 신효철, 정지창), 김천에서 1명(김성순 선생님), 그리고 예천 현지에서 안내해 준 3명(김두년, 한해수, 전장홍 선생)까지 모두 12명이 참가했다. 지금까지의 세 차례 순례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한 셈이다.

예천 군청 주차장에서 김두년(필명 김소내 시인) 선생을 만난 우리 일행은 먼저 윤치문 장군의 묘소로 향했다. 그런데 초목이 우거지고 지형이 어슷비슷하여 일행은 한동안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었다. 선발대가 처음 올랐던 능선을 내려와 다음 번 능선을 탐사하는 사이 어느덧 시간은 12시를 넘어섰다. 결국 김성순 선생님의 제안으로 골짜기 안쪽 뽕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먼발치에서나마 윤장군에게 제례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간소한 제물과 막걸리 한 잔을 따라놓고 심고 의식을 치른 다음 점심 요기를 하는 참에 한해수 선생이 드디어 묘소를 찾아냈다. 두 번이나 지나친 곳에 바로 윤장군의 묘소가 있었다.

윤 장군는 명문가인 파평 윤씨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무관 출신인데 갑오년(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삼자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깃발을 내건 예천 지역 동학군에 가담하여 군사 작전을 지휘하셨다. 기록에는 예천 읍성 공격시에 전사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현지 조사 결과 패전 후 피신 중에 유림측 민보군에게 발각되어 사형(私刑)을 당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야트막한 산등성이 중턱에 자리 잡은 묘소에는 그래도 상석과 묘지명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술 한 잔을 따라놓고 잠시 처연한 심사에 젖어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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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향 의사 추모비

다음으로 찾은 곳은 동학군 지도자 전기항 선생의 묘소와 추모비였다. 이곳은 안내판도 있고 진입로도 잘 닦여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문중에서 가꾸어 놓은 묘소도 깔끔하고 추모비도 번듯했으나 추모비가 묘소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왠지 어색했다. 추연창 선생이 낭송한 비문은 이이화 선생이 짓고 예천의 소설가 박치대 선생이 글씨를 쓴 것으로 절절하고 도도한 명문이었다. 전 선생은 예천 북서쪽에 자리잡은 금당실 마을(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가운데 하나. 예천군 용문면 금곡리) 출신으로 갑오년 당시 동학군의 군량미를 조달하는 모량도감(募糧都監)을 맡았다. 그는 천석꾼인 부농이었으나 군비 마련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은 호탕한 인물(별명이 전도야지)로, 농민혁명 이후에는 무쇠솥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보복을 피해 소백산맥 기슭에서 화전민 생활을 하며 12군데 움막을 전전하다가 1900년 73세로 돌아가셨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나서 그의 손자(전장홍 선생의 조부) 대에서야 가까스로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워낙 보수적인 유림 세력이 강성한 고장이라 집안에서도 선조의 동학혁명 참여 사실을 쉬쉬하며 숨겨 왔다고 한다. 후손 전장홍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참여하면서 문중의 힘을 모아 전기홍 선생의 추모비를 예천읍내나 금당실 마을 송림 등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우려 하였으나 유림 측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묘소 옆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그간의 사정을 전해주었다. 금당실 마을은 현재 관광지 개발을 위해 거액을 들여 전통민속마을로 꾸미고 있으나 동학혁명군과 전기항 의사의 행적을 알리거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문화적 내실(콘텐츠)은 빠져 있는 빈껍데기 사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함양 박씨 유계소를 동학농민군 연락소로 사용했다고 전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다.

다음에 찾은 공설운동장 옆 한내(한천) 강변의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추모비는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동학농민혁명 105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1999년 8월 28일에 세운 것이다. 흑오석 비석의 전면에는 붉은 색으로 음각된 농민군 도상이 희미하고 뒷면에는 ‘동학농민군생매장터’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여기는 예천 동학농민혁명 전투의 도화선이 된 농민군 열한 사람이 생매장 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당시 예천 동학농민혁명군 쪽은 우리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뭉쳐 왜를 무찌르자고 호소하였으나 보수 집강소 쪽은 오히려 갑오년 음력 8월 9일 농민군 열한 사람을 붙잡아 이 부근에 생매장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그러자 농민군은 마침내 8월 28일에 징과 북을 치며 예천읍 총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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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항 의사 추모비를 둘러보는 참가자들

갑오년 당시 예천 지역에는 옹기장수 최맹순 관동수   접주의 포덕으로 전라도 농민군의 봉기 이후 입도자가 급격히 늘어 최대 7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처럼 동학 세력이 강성해지자 인근의 양반 부호들을 징치하거나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이에 양반들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보군을 조직하여 끝내는 농민군을 생매장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최맹순 수접주 등 동학군은 잡아간 동학농민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예천 읍성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음력 8월 28일 예천 들머리인 서정들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민보군은 현산(현재의 흑응산)에서 대포를 쏘며 농민군을 공격했다. 그러는 가운데 청복리 방면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관군 측 구원병 3천 명이 왔다는 거짓 소문이 나돌자 농민군은 대열이 무너져 달아났다. 다음날인 29일 일본군이 읍내에 들어와 민보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추적하여 무차별 학살했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영남 최대의 격전인 예천 전투의 전말이다.

순례를 마치면서 우리는 윤치문 장군의 묘소와 동학군 연무장 안내판을 세우고 울타리로 차단된 생매장터 기념비를 접근성이 좋은 다른 곳으로 옮겨줄 것을 예천군 당국에 요청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번 순례에는 천도교 연원회 해원포의 방상언 선생이 차를 가지고 와서 몸소 운전까지 해 주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천 현지에서 안내해 준 세 분 선생님들과 방 도훈님의 모심과 섬김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기며 순례의 여정을 되밟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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