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천 이야기

3 years ago by in Society

​​​​​​## 이 글은 개벽신문 46호(2015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홍제천 이야기
– 세검정에서 모래내 시장까지(2)

이종희| <우리가만드는미래>역사탐방강사

표지석으로만 남은 홍제교

포방교에서 홍제교까지 천변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홍제교 가까이에는 공원도 꾸며 놓았다. 그러나 홍제교를 끝으로 물길은 지하로 사라지고 유진상가를 지나 100미터쯤 가야 다시 물길과 만난다.

유진상가를 한 바퀴 둘러본다. 지금의 타워펠리스 같은, 70~80년대엔 화려한 주상복합건물이었는데 이제는 낡은 상가가 되었다. 상가 남쪽 건너편으로 인왕시장 입구가 보이고 상가 1층은 쭉 과일도매상이 이어져 있다. 빛깔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편. 다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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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변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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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전교 부근 다리에 사람들 얼굴을 그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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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방교에서 바라본 홍제천

유진상가 홍은사거리는 사촌언니들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동네였다. 나와 15살(?)은 차이가 났을 사촌큰언니가 한의사와 결혼해 녹번동 방향 도로변 붉은 벽돌 건물 2층에 살림을 차렸다. 살림집을 겸한 병원이었다. 숙대생이던 언니는 가난한 한의사와 사랑에 빠져 큰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림을 차려버렸다. 지금만큼 한의사가 인기 있는 직종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하여간 엄마와 함께 간 그 집은 사촌언니네 부부의 남다른 사랑과 달리 낡고 어두컴컴하였던 기억이 난다.

또 홍제동 문화촌아파트에는 둘째, 셋째 사촌언니들이 살았다. 공부하러 서울 올라온 대학생 언니들의 자취집이었다. 70년대엔 말 그대로 ‘문화’가 있는 새로운 주거 형태였겠지만 연탄을 때는 작은 그 아파트가 내 눈에는 성냥갑 같은 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다 이 동네를 떠나 사는 사촌언니들도 문득 홍제동 시절을 그리워하겠지.

유진상가에서 홍제천 물길과 만나려면 홍제현대아이파크 쪽으로 길을 건너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홍제교 표지석이 남아 있다. 홍제교는 일명 ‘서석개다리’로도 불렸다. 아마 현대 아파트 쪽으로는 홍제원이 있었을 것이다. 홍제원은 고려 성종 때 중 정현이 지었다고 하니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려 때는 중요한 길목에 ‘원’을 지어 관리와 여행객들이 숙소로 이용하였다. 홍제원은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계속 사용하였다. 특히 명·청의 사신들이 입국하여 예복으로 갈아입는 곳이었다. 반대로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배웅하기 위한 환송회가 열려 북적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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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 속 홍제원과 사천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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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교(홍제동 323번지와 홍은동 217번지를 잇는 다리)는 ‘화냥년’의 유래가 만들어진 다리다. 병자호란은 인조의 삼전도 굴욕으로 마무리됐지만 억울한 백성 50만 명이 낯선 중국 땅으로 끌려갔다. 그 중 큰돈을 치르고 속환하여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완고한 성리학 사회. 그 여성들의 정절을 문제 삼아 환영은커녕 이혼을 요구하는 양반들도 많았다. 당시 이혼은 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에 사회 문제가 된 이 이슈에 인조는 이렇게 답했다.

– 홍제천에 몸을 씻고 들어오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 이혼은 허하지 않는다.

그런 인조도 나라를 잘못 다스려 백성을 고통에 빠뜨린 자신의 원죄는 반성하지 않는다. 사대에 젖어 나라를 팔아먹은 양반들은 사상적 반성을 않는다. 그러고서 누가 누구의 허물을 용서하며 정절을 문제 삼는가.

서쪽의 돌다리(서석개) 홍제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어딘가로 옮겨지고, 여전히 잊히지 않는 환향녀의 사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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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순환도로 아래르 흐르는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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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개양귀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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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봄의 소리>

길을 걸었네, 모래내까지

사라진 홍제교를 지나 모래내까진 진짜 내부순환도로를 머리에 두고 걷는 길이다. 그늘과 햇빛이 달리하는 길을 따라 이리저리 걷는다.

교각에는 걷는 이들을 위해 그림을 걸어 놓았다 모네의 ‘개양귀비꽃’을 비롯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죽 등장하다가 이번엔 김환기, 이인성 등 한국근현대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김환기의 ‘봄의 소리’. 사각형의 점들은 봄비도 되고, 음표도 되고, 푸른 그리움도 되고, 넓은 봄바다의 파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작의 선명한 색채는 흐려지고 확대한 그림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래도 시멘트 덩어리만 보는 것보다 훌륭하다고 해야 할까? 그림이 비바람에 추레해지지 전에 새로 교체해 주는 센스를 발휘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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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교 폭포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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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교 가까이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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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에서 본 연희동 풍경

백련교 부근에는 폭포마당도 정비해 놓았다. 멀리 물레방아가 보이고 날이 풀리면 황포돛배도 띄우는 모양이다. 가파른 절벽에는 인공폭포를 만들어 놓아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겠지. 산 그림자가 아롱져 한가로웠다.

그리고 어느 새 사천교가 보인다. 우리말로는 정겨운 모래내다리. 홍제천은 다른 하천처럼 구간마다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조선 후기 지도에 ‘사천’이란 명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흘렀던 까닭에 일명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으로 불렸다고. 대부분 우리의 하천이 뱀이 기어가듯이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이기에 한강에 가까워지는 이곳에 모래가 쌓일 법하다. 직강하천으로 정비된 지금은 넓게 쌓인 옛날의 모래를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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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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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내시장

모래내 이야기

모래내는 내게는 친숙한 동네다. 신촌에서 학교를 다닌 가난한 학생들이 자취도 많이 했던 동네. 신촌에서 두어 정거장 거리인데도 시골 같던 남가좌동에는 언제나 싼 물건이 넘쳐났던 모래내시장이 있었다. 1980년대에도 모래내는 북서쪽 달동네였다. 모래내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이촌동 수재민 2,200명이 이주한 이래 용산 후암동 등 도심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들이 흘러들어가 터전을 일구었던 동네였기 때문이다.

시인 이성복은 ‘모래내 1978’에서 모래내는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 같이 웃는 누이…’가 사는 동네라고 했다. 그렇다! 선량하고 가난한 이들이 모여 모래내시장을 일구고 동네가 커지고, 가좌역을 지나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살던 시골 같던 변두리 동네였다.

모래내시장 옆으로 명지대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모래내시장 뒤편에는 부안에서 올라온 친구 K의 자취방이 있었다. 그 친구는 부안의 부잣집 아들(우리는 지주 아들이라고 놀렸다)이어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K를 꼬드겨 자취를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니 집을 빌릴 목돈이 필요했다. 월세야 올라오는 하숙비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집을 빌릴 목돈은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난 장학금 35만원을 받았고, 그 돈은 고스란히 친구의 자취집 구하는 데 들어갔다.

학습 모임을 하던 우리는 모임 장소가 절실하였다. 적은 용돈에 다방과 레스토랑을 전전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아지트가 필요했다. 장학금을 포기한 나는 그때 아버지에게 정말 미안했었다.

문을 열면 움푹 들어간 부엌은 어두컴컴했고, 네댓이 앉으면 꽉 차는 그 방에서 우리는 열띤 토론을 벌였고, 군사독재 반대 유인물을 썼고, 술도 마셨고, 민주주의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천진난만한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우리의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전적으로 옳다.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나온 시간만큼의 진보는 있었다. 우리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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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남가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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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뒤 거리

자취방이 있던 골목은 사라지고 없다. 번지수는 잊었어도 부근만 가면 그 집을 찾을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는데, 마치 고향집이 사라지고 없을 때처럼 쓸쓸하다. 낮은 지붕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던 골목 대신 대규모 가재울 아파트를 짓고 있다. 시장 뒤편의 단란주점들만 아직 골목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모래내시장만 섬처럼 버티고 있다. 모래내시장에도 27층짜리 주상복합 상가 세 동이 들어선다니 시장의 운명도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암환자와 다를 바가 없다. 본디 자본이란 염치가 없기에 한번 비집고 들어오면 맞서기가 쉽지 않다. 아마 모래내시장 사람들 중 비싼 주상복합 상가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모래내시장엔 아직 활기가 남아 있다. 27층 주상복합으로 바뀌는 그 순간까지 억센 숨을 몰아쉬며 버티고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슬프다. 모래내에 오니 사라지는 것투성이다. 가재울(가좌), 모래내란 이름만 남는 것은 아닌지, 모래내에서 마친 오늘의 여정은 그래서 쓸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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