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내면의 평화로 평화

3 years ago by in Peace

## 이 글은 개벽신문 46호(2015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개인 내면의 평화로 평화

윤법달|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평화의 의미, 힘의 평화에서 일상의 평화로

몇해 전 참여한 강연에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인 현각 스님이 초대되었다. 강연의 주제는 평화였다. 평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현각 스님은 평화(平和)를 한자풀이를 통해 정의했다. 평화란 모든 사람이 쌀[禾, 또는 밥]을 공평[平]하게 먹는 것[口]이라고 말이다. 사실,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지만 서양인 스님의 해석이라서 그런지 새롭게 느껴졌으며, 수긍이 갔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평화’는 일본인들이 19세기 말에 국가 사이의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뜻으로 Peace를 평화로 번역해 사용하던 것이 우리나라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설립된 유엔(UN; United Nation)의 헌장(Charter) 1조의 설립 목적, 즉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명시한 것과 헌장 6조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에 드러난 평화의 의미에 잘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Peace의 어원은 라틴어 Pax에서 찾는데 이 말은 이미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힘의 정치 또는 패권에 의한 질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힘(패권, 헤게모니)에 의한 질서는 오늘날 국제 정치무대의 현실주의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Peace(평화)의 의미는 힘에 의한 평화라고 정의한 풍토에서 기원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평화를 오로지 ‘전쟁이 없는 상태’나 ‘정복과 힘의 질서’만으로 해석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상이한 이념과 목적을 가진 다양한 조직들이 평화를 자신들의 단체 이름에 쓰고 있으며, 조직적 지향 또는 설립 목적을 평화 정착이라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는 정치·이념적 개념이 아닌 우리 일상생활의 용어가 되었다. 마음의 평화 또는 평온을 의미하는 것, 즉 개인적 측면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난 1988년 버마 민주화 운동과 총선 패배 이후 자국민의 인권을 처참히 유린하는 정책을 결정해 오고 있는 군부독재 정권의 핵심 의사 결정 기관의 명칭은 국가평화개발위원회(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이다. 또한, 테러를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부 극단주의자들과 이들 조직들은 평화를 위한 지하드(순교)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수많은 정부산하 단체와 민간단체들이 있다. 종교 단체, NGOs, 학술 잡지, 언론 매체, 비영리법인 등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조직들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Peace Corps, Peace Action, Peace Prize, Peace College, Peace Alliance, Peace TV, Peace Boat, Peace Museum 등 정말 다양하다. 구글(google)에 Peace를 검색하면 234,000,000건의 관련 단체 및 내용이 출력된다는 사실은 평화가 우리 생활의 일상이 된 것을 반증하고 있다.

종합하면 평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며, 실제로 다양한 모습으로, 때로는 상호 모순된 모습으로 표출되고, 그 개별 담론 안에 모순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평화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는 작업은 매우 유의미한 것이다. 올바르고 균형잡힌 평화관을 세울 때 평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순된 형태의 행위들을 가려내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평화를 위한 바른 평화실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즉, 평화를 위한 정지(正知), 정판(正判), 정행(正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개인의 평화와 사회의 역학

평화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가 그것이다. “평화 = 직접적 평화 + 구조적 평화 + 문화적 평화”로 등식화하는 갈퉁의 연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평화를 직접적 평화와 구조적 평화 그리고 개인 내면의 평화로 등식화하고자 한다. 문화적 평화는 구조적 평화의 내용 속에 포함되어 중복된 점이 없지 않으며, 오히려 개인의 내면적 폭력성이 행동으로 표출되어 사회 평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이런 맥락에서 개인에 대한 평화교육이 중요하며 궁극적으로 평화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개인 내면의 평화를 추가하고자 한다.

평화에 대한 개인 내면의 관점은 개인적으로 고요하고 평안하게 사는 평온의 상태라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의 내면의 평화를 말한다. 개인이 평화로울 때 집단과 사회가 평화롭고 국가와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구조의 관계가 상호 의존적 또는 상호 유기적이다고 할 때, 개인 내면의 평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자칫 직·간접적 폭력의 구조의 존재를 묵인하는 것이 되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폭력적 상황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어 근본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개인의 폭력성은 분명 사람들과의 관계와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평화를 깰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분쟁지역에서와 같이 구조적 폭력과 직접적 폭력이 만연하여 고통 받은 사람들은 물론, 일상적 삶을 영위하는 개인에 대한 평화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화의 역동성, 철학이며 패러다임

평화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다. 직접적 폭력이 없는 소극적 개념, 사회 구조적 폭력이 없는 적극적 개념으로서의 평화, 그리고 개인적 측면의 평화가 모두 평화를 정의 내리는 데 필요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달성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의 중요함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평화는 국가, 집단(사회), 개인을 망라한 모든 행위자들(지구를 포함한)의 유기적 관계와 이에 대한 종합적 접근이 필요한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평화란 언어에서 오는 정적인 느낌과는 달리 역동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대결적이고 파괴적인 사회의 상호작용을 좀 더 협력적이고 발전적인 관계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히즈키아스 아세파와 같은 평화운동가는 평화는 철학이며 동시에 그 자체가 자치와 규칙을 갖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철학과 패러다임은 통합적이고 인도적 사회질서를 창조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조절의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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