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자본주의

2 years ago by in Society

​​​​​​## 이 글은 개벽신문 46호(2015년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공동체와 자본주의

심규한| 프로필

공동체, 정의로운 공동체의 해체와 자본주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개체를 포함하는 전체다. ‘나’를 포함하는 ‘우리’이며, ‘나’의 ‘큰 나’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한 ‘우리’ 안에 수많은 ‘나’를 포함하며, 이때의 ‘나’는 상호 간주관성에 의해 연결된다. 때문에 공동체의 생명은 평등이고, 평등은 공감에 의해 뒷받침된다. 평등하지 않다면, 공감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고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에 의해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짜일 때 공동체는 하나의 전체로 통일된다. 이렇게 이상적인 공동체를 편의상 정의로운 공동체라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공동체도 한계가 있다. ‘우리’라는 말은 안과 밖의 개념을 거느리고 있다. 안의 우애 평등과는 대조적으로 밖과의 반목 차별이 전제된다. 즉 공동체는 항상 내외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경계 문제를 잊지 않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다. 이런 경계의 갈등을 해결할 때 우리는 승화를 경험하며, 경계가 무한히 확장되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궁극의 상태에 도달하면 진리 내지 신과의 일치를 체험한다고 한다. 우리 의식은 우주와 존재 너머 비존재까지도 아우르는 공동체로까지 계발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공동체의 내외 경계 문제보다 공동체 내부의 정의 문제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공동체의 층위는 무수히 다양하며 전통적 공동체와 현대적 공동체의 성격도 다르다. 중요한 점은 인간이 공동체적 동물로서 공동체를 통해 삶을 영위하여 왔다는 점이다. 원시사회의 가족 공동체와 부족 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전통사회에까지 이어진 자급자족형 원형 공동체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와서 혈연과 지역의 공동체를 대신해 다양한 목적 공동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취미와 실용, 그리고 대안 공동체들이 그들이다. 종교 공동체나 협동조합, 동아리 등이 그런 예이다. 전통적 공동체가 삶의 전체성을 특징으로 한다면 현대적 공동체는 삶의 부분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로운 공동체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불행하게도 정의로운 자급자족형 원형 공동체를 비롯해 각종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정을 밟아 왔다. 가족과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가 점차 해체되고 급기야 1인 가족이라는 말이 탄생할 정도로 원자화되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유기적이기보다 기계적이 되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원자화된 개인의 탐욕을 무한히 추구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무한히 축적할 수 있는 돈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개인이 전체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극대화를 통해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만족하게 되었다. 성공한 개인에게는 욕망을 마음껏 추구한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실패한 타자의 생존을 위협하고 공동체의 정의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사회암이라 부르는 게 적합할 것이다.

자본주의 초창기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운동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지역민들의 공유지였던 초지와 숲 그리고 농지를 사유지 목장으로 전환하고, 양모를 생산해 섬유산업을 일으키면서 영국의 산업혁명은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이농현상이 시작되고, 가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 민족 공동체, 생태 공동체가 차례로 파괴되는 현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전 지구적으로 반복되면서 현대 세계 자본주의가 성립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960, 70년대 근대화를 겪으면서 이농과 급속한 공동체 해체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남은 것은 자본의 무한경쟁, 즉 만인 대 만인의 영구한 투쟁이다. 이렇게 공동체가 해체되었는데도 우리는 아직 실체 없는 ‘우리나라’를 외치고 있다. ‘우리’라는 말이 점점 무색해진 시대. 전통과 습관에 의해, 또 국가 이데올로기의 세뇌에 의해 ‘우리나라’라 부르짖지만 참된 ‘우리나라’라 부를 만한 국가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아무리 원자화되고 자본이 전 세계를 유린해도 건강한 공동체의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적 동물인 인간은 개인의 욕망 추구와 더불어 전체 안에서의 안녕과 조화도 추구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다양한 목적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 삶의 근본조건과 원리는 자본주의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다. 당연히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정의로운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에 의해 왜곡된 관계들을 바로잡지 않고는 ‘나’와 ‘우리’의 온전함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와-자본주의1

“Many Hands” by Sharon & Nikki McCutcheon(@https://www.flickr.com/photos/130552842@N04/1686419)

 

공동체를 유지하는 다양한 경제 활동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도 경제요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도 경제다. 자본주의와 자급자족은 양립이 어려운 경제원리다.
앞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원형을 원시사회의 자급자족 공동체인 가족과 부족에서 찾았다. 가족과 부족은 같이 먹는다. 그러므로 자기 것을 따로 쌓아 두지 않는다. 공유한다. 쌓아 둔다면 공동으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짐승들도 한다. 숲에 가 보라. 겨울을 나기 위해 개미도 창고를 채우고, 다람쥐도, 곤줄박이도 도토리를 여기저기 묻어 둔다. 즉 자연의 모든 개체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축적한다. 필요에 따른 축적은 그럴 권리로 인정된다. 그렇게 쌓아둔 것을 공동생활을 하는 개미나 벌은 역시 공동으로 사용한다. 큰 틀에서 볼 때 생태에 적응해 살아가는 동물 공동체와 인간 공동체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무엇이든 이렇게 알맞고 적합하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지나친 이기심으로 개인과 가족만을 위해 쌓아두고 공동체와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공동체의 적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도둑이며 정복자이다. 공동체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에 지탄받고 추방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서 많이 가진 자는 없는 자와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등이 중요하다. 공동체 안에 부자와 굶주리는 자가 함께 있다는 것은 공동체의 수치다. 때문에 원시부족들은 건강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축적의 잉여분을 정기적으로 나누거나 소진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고여 있는 재화가 사회를 썩게 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포틀래치나 남태평양 원주민의 조개 목걸이를 매개로 한 선물교환 축제는 부의 집중을 견제하고 공동체 혹은 공동체 간의 결속을 도모하는 축제였다. 의례를 통해 자본 집중에 의해 심화될 수 있는 불평등을 해소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 공동체만 잘 사는 것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도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생태적 존재인데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생태 파괴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6의 멸종으로 불릴 만큼 생태를 파괴하고 있다. 자연의 보다 큰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에 지나치게 부유한 공동체를 건강한 공동체라 부를 수 없다. 결국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소박함이다. 왜? 부유한 공동체는 더 큰 자연의 생태 공동체를 도둑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간 공동체는 인간이 속한 생태 공동체 내지 지구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공동체의 안과 밖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생태 공동체, 지구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그저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풍요에만 매몰되어 사회 정의조차 구현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을 존중하고 또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먼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자연의 문제가 인간의 문제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이 곧바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에 부자와 빈자가 공존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수치다. 아니면 이미 공동체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난과 빈자는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와 자본과 언론은 모든 문제와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갖가지 대립이 존재한다. 성공과 실패, 유능과 무능, 부지런함과 게으름, 부자와 빈자, 자본가와 노동자, 경제인과 비경제인 등. 그러면서 소수자와 약자가 양산된다. 이 속에서 부자들의 사회는 빈자를 죄인화하여 응당 부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외면하고 도덕적 당위론이 만연한다.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타인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것이다. 자본이 공동체의 적인 것은 자본의 부가 빈자를 수탈하고 가난을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가 잊은 것이 있다. 부는 책임이 따르는 사회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소박과 검소, 공동체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덕목

우리는 앞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자급자족 경제를 이야기했다. 또한 우리의 풍요로운 문명이 야기하는 생태 파괴를 이야기했다. 때문에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자급자족과 소박, 그리고 검소를 이야기해야 한다.
가난은 부자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소박과 검소는 전체 공동체와의 조화를 만들어 나가는 길이다. 소박과 검소가 실천되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부자의 사치와 허영이 가난한 자의 주림과 수치를 메꿔주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은 물질적 배분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평등이란 단순히 돈을 나누는 것으로만 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삶과 사회가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검소해지는 것에 의해 달성된다. 하지만 보라. 자본주의 사회에 소박이야말로 추방 대상이 아니었던가?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과잉축적, 사치는 허용되어도 소박과 검소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미덕이 아니었다. 상품이 휩쓸고 간 자리엔 온통 쓰레기와 가난이 넘친다. 때문에 우리가 소박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본 곧 전체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개인의 무한축적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다. 그래서 간디는 ‘부자가 있는 한 가난한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자로서 생계를 걱정하며 돈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시스템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양심이 반대하고, 흥미가 없어도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오히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고 안달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시장을 유연화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일상적 삶을 이렇게 비참한 조건으로 유지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의 의식은 존재에 의해 압도되었다. 도무지 양심을 지키고 제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다. 자신의 참된 욕구를 무시하고 자본의 요구에 맞춰 살아야 하니 정신은 분열 상태를 경험하고 스트레스는 포화되었다. 아무리 노동운동을 하고 진보운동을 해도 자본을 위한 게임을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다. 도덕적 정당성을 물어야 하지만 생계의 위협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본기계의 부속이 된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해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듯하다.
우리는 사회악이라고 불러야 할 각종 대기업에 목을 매달고 있다. 노조 탄압과 불공정거래를 일삼는 게 비일비재해도 상관하지 않을 만큼 무뎌져 있다. 극단적인 예로 군수산업체에서 일하는 성실한 사람에게 도덕성을 물을 수 있을까? 타인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대형할인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점원에게 도덕성을 물을 수 있을까? 삼성, 현대, 대우, 쌍용 등 수많은 대기업에서 차별을 견디며 근근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양심과 도덕에 의해 순수하게 행동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벌사회 국가주의 교육으로 찌든 학교에서 교사의 양심이 견뎌낼 수 있을까? 악을 위해 복무하면서 선을 가르치는 일이 가능할까? 정신의 분열을 경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근본 질문을 포기한다. 가난과 생존의 위협을 견디면서. 하지만 물어야 한다. 묻고, 자급자족할 수 있고 소박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와 공동체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자명하다. 개인의 무한한 욕망은 전체의 질서를 희생시킨다. 둘은 상충한다.

 

정의로운 공동체, 오래된 밀의 대안적 공동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과 자본주의사회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계 차원에서 최소한의 자급자족이 필요하다. 자본이 마련한 상시적 생계 위협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야지만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위 할 수 있다. 맹자의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이 공적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자급자족을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생존에 묶인 삶은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의 정의로운 공동체는 사라진 전통적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의 구성원인 자유로운 개인은 기존의 자본주의적 양식이 구속하고 있는 생존 차원을 탈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자급자족의 수단에 기반 해야 한다. 물론 자급자족이라고 해서 1인 자급자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공동체처럼 평등하고 상호적인 관계에 의해 공동체적 자급자족을 실현하면 된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상부상조는 이런 자급자족 위에서 마련되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자본 의존 사회에서 마련될 수 없다. 각종 보험상품은 상부상조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불안을 다시 상품화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토대가 없기에 각종 유기농 상품과 매장도 자본과 시장에 포섭되는 결과가 이어지고 있다. 자본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부가 가장 큰 문제이지만, 공동체의 부도 검소의 기준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가 부유해질 가능성이 있다면 즉시 나머지를 무상증여 내지 교환의 형식으로 다른 공동체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더 큰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배타적 공동체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태어나 모든 사람들이 자고 먹고 입을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평등을 기반으로 한 상호부조는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원리로서 상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호혜적 상부상조야말로 공동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동체의 적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한다. 가족을 파괴하고 부족을 파괴한다. 토착의 지역과 문화는 물론 자연을 파괴한다. 지구를 파괴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유포한 인간상을 경계하고 탈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인의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의 자유란 곧 자본의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평등이 전제되지 않은 자유는 책임을 회피한 폭력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원자적 개인관은 부자에게나 빈자에게나 반공동체적 생각을 유포하고 소유에 쩔게 만든다. 그야말로 자본은 돈을 향한 순수한 욕망기계를 주조할 뿐이다.

세계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하나의 우주전함 같은 메트릭스가 되어 가고 있다. 사회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위험도는 증가하고, 모든 권력은 자본에 종속된 테크노크라트들이 장악하고 있다. 개인의 무능과 왜소가 극단에 이르고 있다. 사회 도처에 자살이 만연한 것은 이러한 절망감 때문이다. 완전한 무기력이 열반을 부추기고 있다. 공동체의 이야기나 꿈도 에덴동산이나 노아의 방주처럼 비현실적 신화로 느껴진다. 그래서 현대에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절박하게 우리는 자본에 환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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