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 선생을 찾아서

3 years ago by in 개벽뉴스 Tagged: , , , , , ,

김창환 (대구동학연구회 회원)

 

오랜만에 개벽신문 독자들에게 인사드리게 됩니다. 지난 2013년 동학을 중심에 두고 백일 동안 순례를 할 때 인사를 드렸던 길위(路上) 김창환입니다. 그때 그 일 이후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천도교 대구시교구에 인사하러 갔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수운 최제우 선생 순도지에 세울 비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수운 선생 순도지 표지석을 관덕당 터 근처에 세우는데 천도교단(중앙총부)에서는 ‘천도교 교조’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고, 표지석 설치를 심의 의결하는 대구시의 관련 기관에서는 ‘(특정 종단의 이름을) 못 넣는다’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운 비석을 세우는 데 온통 관심을 두고 있는 김성순 선생님의 간절한 눈동자가 눈에 밟혔습니다. 동학의 중심은 대구 경북이라고 그렇게 뛰어다니셨는데, 마지막 관문에 걸려서 일이 진척되지 않는 상황이 못내 안타까운….

 

숙소로 돌아와 하루 저녁을 고심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작년 관덕당을 찾던 과정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지금 있는 관덕정(천주교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대구 중구 관덕정길 11) 자리가 수운 선생이 순도하신 곳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자료를 뒤져보니 우선 이름부터가 ‘관덕정’이 아닌 ‘관덕당’입니다. 뒤에 붙은 ‘정’과 ‘당’의 차이는 크죠. 보통 정자 하나라는 ‘정’을 붙이고요, ‘당’은 그보다는 큰 기구이며 건물입니다. 아마도 애초에 관덕당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 건물만 남게 되자, 그 건물의 이름을 ‘관덕정’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수운 선생이 순도한 곳은 엄연히 ‘관덕당’이었습니다. 이 무렵 저는 또 하나 중요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1928년 5월 1일자 중외일보 기사입니다.

5_중외일보_1928-05-31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윤갑자 3월 10일에 경주군 구미산하 가정리에서 성장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대구부 남문 밖 관덕정(觀德亭)에서 당시 동학당의 괴수로 난정자(亂政者)라는 죄목으로 참혹한 형벌을 받아 자기의 주자하는 도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날이다. 그 후 세상의 변천을 따라 관덕정은 군용지(軍用地)로 다시 어떤 일본 승려에게 이전되며 사찰로 있다가 명신학교(明新(=明心?-인용자 주)學校)로 이전되고 다시 복명(復明)보통학교로 김울산(金蔚山) 여사가 자기가 경영하는 학교를 남산정에 이전하게 되기까지 사용되었다. 최수운 선생의 제자인 상제교주 김연국 씨가 이 관덕당은 우리 교조가 순도한 곳인고로 우리 교도는 (중략) 일만일천 원의 거액을 주고 사서 엣날의 모양 없던 집을 새로 단장하여가지고 설단(設壇)한 후에 29일에는 순도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충남 계롱산하 신도안에서 교도가 다수 왔다더라.”

 

그러면서 중구에 가서 당시의 주소를 검색하니 지금의 위치인 대구 반월당 동아백화점 뒤의 문화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확신이 들었고, 대구에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그 집의 유래를 조사하여 <대구신택리지>라는 글을 쓰고 계시는 권상구(사단법인 시간과 공간연구소 이사) 님을 만나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리고 그분의 조사를 통해, 1930년대까지는 수운 선생 비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죠. 2m쯤(사람 키)의 비석이 있었다는 증언을 청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료는 천도교 기관지 <신인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김진용, 당시 대구시내 모중학교 미술교사-인용자 주)는 천도교를 신봉하지는 아니하나 동학의 역사와 그 사상에 공명하고 마음으로 수운 선생께서 참형 당하신 곳이 바로 제가 출생하고 자라난 대구인 까닭에 어렸을 때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대구 남문 밖에 있는 관덕정이 있는 일대가 대구장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 그 후에 나는 그 유적을 답사한즉 왜정 때는 관덕정(觀德亭) 부근에는 상제교당(上帝敎堂)이 있었는데, 1925년에서 1928년까지 그 교당 안(후에 상제교당이 들어선 그 자리에-인용자 주)에 명심학당(明心學堂)이라는 보통학교가 있어서 사용타가 1930년에 이 학교는 당시의 복명(復明) 보통학교로 이사해 갔고 (상제교의 대구 본당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인용자 주) 상제교당의 뜰에 수운 선생 당시 처형의 전말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근년에 와서는 그 비석을 볼 수가 없습니다.”(대구 김진용, <최수운 교조께서 참영 당하신 대구장대(大邱將臺) 유적을 찾아서>, 신인간338호, 1976.7, 18쪽)

 

그러나 거기까지. 그때 저는 그 다음 일정이 있어서 대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수운 선생께서는 대구에서 순도하신 지 한 갑자가 갓 지난 그 때에 대구 그 자리에 순도비가 세워진 것은 참으로 동학 선열들과 대구 지역 시민들의 음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수운 선생을 종교 교조로서 모시고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높은 영성과 덕성의 스승으로 알고 흠모하는 이로서 깊은 감명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인연으로, 올해 다시 관덕당 표지석 설치 문제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옛날 1930년에 상제교 교당 뜰에 세워져 있던 그 비석을 찾자는 것입니다. 힘은 없지만 그래도 동학을 생각하며 백일 동안 전국을 걸어 보았으니 내가 찾아 나서 보자. 그렇게 결심한 것이 7월 15일의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대구동학연구회> 회원들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추연창 님을 비롯한 연구회 회원들이 흔쾌히 동참해 주기로 했습니다. 직접적인 사안은 제가 처리하기로 하고, 중간중간에 대구동학연구회 프로그램(동학순례)과도 결합할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먼저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어딘가 사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처음에는 백일 동안 일인시위를 하려 했습니다. 관덕당 본래 자리 앞에서 수운 최제우 님의 비석을 찾는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일인시위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권상구 님이 그건 “예수천국”글자를 크게 써서 붙이 거리를 다니면서 예수 팔아먹는 행위와 같아 보인다는 말을 듣고 발품을 팔아 찾아다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시작한 이후 매일의 일지

첫 번째는 현재 분석된 자료에서 출발하기로 하고, 먼저 권상구 님의 자료(<수운에게로 가는 시간여행>(수운대신사순도150주기 학술발표회, 천도교중앙총부 주최, 2014.3.10., 대구공업대학강당)를 분석했습니다.

우선 자료에 등장하는, 지금의 대구 염매사장의 마산상회 황선명 님을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첫날 염매시장 마산상회에 가니, 나를 맞이한 이는 세를 들어 장사하는 사람인데 황선명 씨에게 연락을 넣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황선명 씨를 만나니 지금은 찾고 있는 게 수운의 비석이냐고 되묻더니, 자신이 직접 본 것은 달성 서씨의 비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76년의 대구 시내 모중학교 미술선생이신 김진용 님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이분은 1976년도에 <신인간>(338호)에 대구장대(관덕당)을 찾아보았던 기록을 투고한 분입니다. 당시까지의 기록 중에 중요한 언급(비석)을 하고 있어 결정적인 제보를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되는 분입니다. 먼저 도교육청을 방문하여 자료를 뒤졌으나 그런 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미술 선생님이었으니 대구미협을 찾아가면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언을 듣고 대구미협을 찾았습니다. 두류공원 근처에 있는 대구미협 사무실을 찾아갔으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사무실이 휴무 중이었고, 세 번째 겨우 찾아가 담당자를 만났으나, 그런 회원은 없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대구 지역에 아시는 화가분에게 김진용이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역시 실패.

세 번째로는 1920년대에 관덕당 터에 있던 상제교 관계자에게 문의하였습니다. 카톡으로 어렵게 김연국 선생의 손자인 김명기 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김명기(1950년생) 님은 상제교당 건물은 알고 있었으나, 그 건물 뜰에 비석이 서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김명기 님은 오히려 제가 조사한 자료들(관덕당 터의 변천과정 등)을 접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하다며, 꼭 비석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곤란한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수운 선생 순도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 일제 강점기 시절의 비석을 찾아다닌다는 소식을 알고, 대구 지역의 천도교인 몇 분이 천도교(교구)에 미리 얘기하지 않은 것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용을 모으는 것을 질책하였습니다. 난감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로서는 왜 일개 시민이 수운 최제우 선생의 흔적을 찾는 일을 천도교(교구)에 미리 공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것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비용 추렴은 이 일의 뜻에 공감하는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필요한 비용을 모아 주는 것인데, 이 또한 누구에게 보고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저는 이 일을 하고 있는 저의 활동과 모습을 보여드리고, 일이 되는 만큼, 또 안 되면 왜 안 되었는지, 그 내용을 소상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관덕당 터(대구시 계산동 245-1번지; 원적-덕산정245)의 변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권상구 님의 앞의 자료에서 인용함)

 

1749년, 관덕당, 도시청(都試廳), 영남제일문 서남으로 200보 거리, 별무사 및 선무군관의 통합시험 장소 겸 군사 훈련장, 사형장(국유지, 대구읍지)
1888년, 관덕당(고예당이라고도 함, <자인총쇄록>(오황묵, 1988)
1906년, 진위대 연병장(국유지, 대구물어, 카와이아사오)
1906년, 경상북도교원양성소(서상돈, 정규옥, 서병오 등 65인 모금, <새하늘 새땅을 여는 빛>(45호, 1987.1, 윤광선))
1911년, 일본군 연대본부(1914년지도)
1917년, 대구운송주식회사 이사 伊藤吉三郞 소유
1923년, 박기돈(朴基敦) 소유
1925년, 김울산, 명신학교, 명신학당
1928년, 김연국, 상제교 대구본당
1948년, 김도경(金道卿, 김연국의 차남) – 상제교 분파 (1911년 이후 소유권 이전 현황은 폐쇄토지대장 참조, 기타 중외일보 1928.1, 신인간 338호 참조)
1960년, 6.25 전쟁 당시 마산상회 안쪽에 돌로 만든 사람 키 높이의 순도비 있었음, 60년대 이후 상가 조성되면서 헐림(마산상회 황성명(80) 증언(영남일보)
1960년, 60년대 말, 관덕당 건물 철거 (영남교회사연구월보, 제12호, 1992.8, 윤광선)
현재, 문화아파트(염매시장 상가아파트, 윤광선 위의 글)

 

추신 : 현재 이 일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비석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가 영영 찾을 수 없는 지경으로 없어지거나 파괴되거나 묻혀 버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 비석을 찾지 못하더라도 수운 최제우 선생의 자취를 찾는 일은 많은 의미를 던져줄 것으로 믿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사람들 사이의 마음의 흐름과 제도권과 비제도권, 종단과 일반시민, 종교단체와 지자체 사이의 ‘관계’라는 것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아울러 가며 이 순례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7월 말까지 이야기입니다. 8월과 9월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이 일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후원계좌 : 추연창(대구동학연구회) 신한은행 110-436-840693) <다음호에 계속>

The author didnt add any Information to his profile yet

  • Published: 403 post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