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말을 잊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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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국 _ (사)생평과 평화의 길 운영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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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길을 햇살 흠뻑 맞으며 혼자 걷노라면 드넓은 푸른 하늘도 가끔은 내려와 마중하고,

산도들도 시냇물도 온통 은총과 축복으로 님 마중 하듯 하더이다!

솟구치는 흥취에 도연명의 더 없는 절창 음주 시 한 편 띄우니, 깊어 가는 가을 흥취에 흠뻑 취해 보소서.

 

 

술을 마시며(飮酒)

동진(東晋) 도연명(陶淵明)

 

사람 사는 저자 바닥에 오두막 한 채 짓고 사나

어디 시끄러운 수레소리 따위가 들렸으랴.

結盧在人境 而無車馬喧(결로재인경 이무차마훤)

그대는 과연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저 먼 곳을 향하면 있는 자리야 어디든 상관없다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문군하능이 심원지자편)

 

동쪽 울타리 밑 국화 한 송이 꺾어 들고

허리펴며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채국동리화 유연견남산)

 

해 저무는 산 풍광 아름답기만 하여라.

새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

 

저 모습 속 모든 게 들었거늘

부질없이 헤아리려 하나 이미 말을 잊어버렸으니.

此中有眞意 欲辯己忘言(차간유진의 욕변이망언)

 

한시는 행과 행 사이, 행간 또는 여백 속에서 울려 퍼지는 뜻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시가 품고 있는 상징의 비의(秘意)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이 시의 셋째 구절, ‘채국동리화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을 천고의 절창이라고 상찬하는 말은 들어 봤지만, 정작 왜 그런지 그에 대한 번역이나 해설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으니, 나는 내 나름의 귀를 열어 행간에서 울리는 뜻의 소리를 들어 보았다.

 

사람들이 사는 누항, 저잣거리에 오두막 한 채 지어 살고 있으나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수레마차 소리 따위야 아예 듣지도 않고 살 수 있다는 건 오탁악세(五濁惡世: 五濁은 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命濁 衆生濁 煩惱濁 見濁 劫濁)의 예토(穢土; 더러운 땅=이승)에 살면서도 마음은 늘 저기 멀리 정토(淨土: 부처나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사는 자리 따위야 언제나 옹색할 뿐이다.

하여 그대에게 묻는다. 마치 연꽃을 들고 마하가섭에게 묻던 옛 석가모니 부처처럼. 질문을 던진 뒤, 그냥 말없이 행동으로 나아가 진정 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마음의 벗, 지음을 찾는다. 도연명은 자서전이라 할 <오류선생전>에서 술만 취하면 늘 줄 없는 거문고, 무현금을 탔다. 아마 그 뜻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상고절(傲霜孤節), 찬 서리 내린 후 외로이 홀로 피어 우뚝한 절개를 자랑하는 국화 한송이를 동편 울타리 밑 꽃밭에서 꺾어 허리를 펴면서 아득히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이 경지가 바로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의 뜻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해 저물녘 붉은 노을 아래 스러져 가는 산의 저녁 풍광은 그냥 그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때 새들 역시 돌아갈 때를 알아(知還) 짝을 이루어 옛집으로 돌아들 가니, 이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이는 흥에 취해 시상이라도 분별하여 헤아리다가, 아차! 저 모습 그대로가 참인 걸! 깨닫고선 이미 말을 잊어버리는 경지를, ‘채국동리화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의 이심전심으로 변용되고 있다. 이렇게 풀어야 이 시의 참 뜻에 더욱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아닌가? 아니라면 그대도 이 시를 외며 그대 나름의 뜻의 울림을 느껴 보시면서 이 가을을 만끽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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