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을 잊지 말자 –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청백리이자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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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잊지 말자
–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청백리이자 문인

박성수| 역사학자

 

1. 임금의 청탁을 거절한 법관 정철

송강 정철 하면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떠올리겠지만 송강(松江 鄭澈, 1536-1593)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의 한 사람이었다. 정철은 중종 31년 서기 1536년 서울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는데, 10살 때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원도로 유배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도 정철은 16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정철은 어릴 때 궁궐을 출입하면서 당시 태자이던 명종(明宗, 재위:1545~1567)과 친숙한 사이여서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명종이 축하연을 열어 초대를 했다.

정철이 누구보다도 임금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직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련이 닥쳐왔다. 명종 임금의 사촌 되는 사람이 살인죄를 범했는데 정철이 이 사건을 맡아 재판하게 된 것이다. 임금은 정철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사촌을 관대하게 처분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고지식한 정철은 임금님의 청탁을 듣지 않고 법대로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다. 임금은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여기 저기 하찮은 말직을 전전하는 정철을 돌봐 주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군주를 전제군주라 하지만 요즘의 대통령보다 못했다. 요즘의 대통령이었다면 자기 사촌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임금을 달랐다. 게다가 정철은 임금의 죽마고우였다. 그런데도 임금의 청을 거절하였으니 얼마나 곧은 관리였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고집불통의 인물로서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록에 보면 정철을 “얼음 넣은 옥병(玉甁)처럼 차고 결백했다”느니 “천상의 사람 같다”느니 평을 하였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정철에게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온갖 중상모략의 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2. 정철의 훈민가를 기억하자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정계는 크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쟁이 시작되었다. 곧고 곧은 정철이 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철은 워낙 성격이 곧았기 때문에 동인 서인을 막론하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관철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서인들은 정철을 앞세워 자기들의 논객으로 삼았다. 동인은 주로 영남 사람들이었고 서인은 주로 충청도와 경기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흡사 요즘의 영남과 호남이 대결하는 것같은 양상을 띠었다. 어쩌면 당쟁이 오늘의 영호남 대결의 뿌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서 단연 동인, 즉 영남이 우세하였다. 서인의 대변자 역을 맡았던 정철은 중앙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좌천당하였으나 다행히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강원도 관찰사직을 맡아 벼슬을 유지하였다. 원주의 강원도 감영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강원도내를 순행하였는데 워낙 청렴결백한지라 모두가 그를 총마어사(驄馬御史)라 불렀다. 총마어사란 늘 말을 타고 민정을 살피는 청백리란 뜻이다.

이때 정철은 금강산을 비롯한 도내 명승지를 돌아다니면서 타고난 시상(詩想)에 불을 붙였고 장편시 <관동별곡>을 지었다. 그리고 또 <훈민가(訓民歌)> 또는 <권민가(勸民歌)>라고도 불리는 노래 18수를 지었다. 그 안에는 (1) 아버지는 옳아야 하고 어머니는 인자하여야 한다[父義母慈] (2) 가난과 병환은 친척이 서로 도와야 한다[貧窮患難 親戚相救] (3) 송사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無好訟事] (4) 자제는 가르쳐야 한다[子弟有學] (5) 농사와 잠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無惰農桑] 등 다섯 가지 항목이 들어 있었다. 훈민가는 매우 알기 쉽고 실천하기 쉬운 말이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국인의 생활철학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요즘 인성교육이라 하면서 엉뚱한 교육을 하지 말고 정철의 훈민가를 가르치라.

정철은 3년 동안 강원도에서 귀중한 나날을 보내다가 다시 중앙에 돌아와 예조판서(禮曹判書)직을 맡았다. 예조판서라면 요즘의 내무장관이다. 그때 정철과 절친한 이율곡이 이조판서를 맡고 있었다. 이율곡은 10년 뒤에 다가올 국난(임진왜란)을 내다보고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이 맹렬한 추방운동을 벌여 율곡은 서울을 떠나고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율곡의 죽음으로 정철은 홀로 남아 정적인 동인들과 싸워야 했다. 정철은 임금이 하사한 말을 타고 열심히 공무에 정진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헌부에 정철과 이이 두 분이 계시는 한 관청에서 부정부패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인은 외톨이가 된 정철을 2년 만에 관직에서 내어 쫓으니 정철은 또다시 낙향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돌아온 정철은 우울한 나날을 보내면서 유명한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어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충절을 노래하였다. 그러기를 4년 만에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났다. 정철은 감연히 서울로 올라와 왕에게 반역자의 처단을 진언하였다. 그리고 어명을 받아 동인들을 고발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그 공로로 정철은 일약 우의정으로 발탁되었으나 동인인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이 되니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아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왕자 책봉 문제를 잘못 건의하였다가 임금의 진노를 사서 관직을 삭탈당하였고,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이때가 1590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3. 임진왜란과 의병장 정철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더니 순식간에 서울이 점령당하였다. 그 때 정철은 강계에 유배당해 있었다. 선조가 개성까지 피난하였을 때 모든 백성들은 이산해 같은 간신을 믿고 정철 같은 충신을 버렸다고 입을 모아 비난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비로소 선조가 잘못을 깨달아 이산해를 해임하고 정철을 불렀다. 왕의 부르심을 받고 임금님 앞에 엎드린 정철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만일 자기가 서울에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터인데 거의 전 국토를 왜적에게 점령당하였으니….

선조 임금이 정철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가 물었다. “제가 호서와 호남의 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호서와 호남은 당시 왜군의 점령 하에 있거나 포위되어 있었다. 적진에 들어가서 순찰하는 것이니 사지(死地)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철은 즉각 임지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과연 의병들은 벌 떼같이 일어나 적군을 적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정철의 다음 임무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인들은 끝까지 정철을 모함하였다. “정철이 명나라에 가서 왜군을 모두 몰아냈다고 말했다”고 모함하여 정철은 명나라에서 돌아오자마자 스스로 직을 사퇴하고 강화도로 은신하였다. 그가 머물게 된 마을 이름은 강화 송정촌(松亭村)이었다. 정철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했다. 향년 58세. 일생을 모함 속에서 살다가 결국 모함으로 세상을 떠난 정철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단순한 청백리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청백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투사였던 것이다.

송강 정철에게서 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술이다. 만일 정철에게 술과 시가 없었다면 58세라는 천수(天壽)마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인 <관동별곡>을 남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한낮에 술에 취한 정철에게 지나가던 나그네가 당신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철은 대답하기를 나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 없는 취객이요.”라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취객이 아니었다. 부정부패와 싸운 용기 있는 청백리요 왜군과 싸운 의병장이요 관동별곡을 지은 국민시인이었다.

광복7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혼자 애국자연하던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다 어디로 숨었는지 얼굴을 볼 수 없구나! 나와서 한마디 반성하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싫다면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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