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닉 섹스의 기원(4) -가족 제도의 어두운 역사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2호(2015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플라토닉 섹스의 기원(4)



-가족 제도의 어두운 역사


 



도연명| 출판인·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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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을 극도로 억압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폐막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된 것은 나름대로의 상징성이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 인류는 완전히 변모한 시대로 진입했다. 대중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며 성개방도 급격히 진행됐다. 여권 또한 신장되어 서구에서는 여성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남성 못지않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성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는 여성들도 늘어났다.



얼핏 인류는 모계제로 다시 접어들만한 제반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장애물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속박하는 여러 가지 그릇된 통념들이다. 이 문제를 추적해 들어가는 작업은 예상치 못한 쟁점들과 계속 맞부딪힌다는 면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다양한 고정 관념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 얽혀 있다.


 


 


문란한 난혼과 도덕적인 일부일처제?



우선 우리가 갖고 있는 통념 하나를 도마 위에 올려 보자. 위키피디아에 ‘난혼’을 검색해 보면 ‘상대를 가리지 않는 성관계 문화’라고 설명되어 있다. 관련 검색어로는 뜬금없이 ‘원나잇 스탠드’가 올라와 있다. 국어사전에도 ‘원시 사회에서, 일정한 부부관계 없이 아무하고나 무질서하게 맺는 성적 결합’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상당히 문란하고 추잡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난혼을 현대인들의 ‘원나잇 스탠드’와 결부시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수렵채집인들의 공동체는 기껏해야 150명 정도의 규모를 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사이인데다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연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연애는 낯선 사람과 술집에서 만나 말초적인 욕정을 해소하고 헤어지는 ‘원나잇 스탠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섹스처럼 다양한 맥락을 가진 행위도 드물다. 때론 다양성의 도가 지나쳐 동일 행위로 간주하기가 심리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신혼부부의 첫날밤 섹스가 매춘이나 강간을 통한 섹스와 동일 행위로 분류되기 어려운 것처럼, 선사시대의 섹스도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부여된 행위였을지 모른다.



현대인들은 섹스의 즐거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육체적인 욕망의 배설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피지컬 섹스(physical sex)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차가운 불’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뜨거운 불’이란 말을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섹스도 육체적인 행위라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피지컬 섹스란 말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섹스는 일종의 소통이며, 원래 정신적인 교감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던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에겐 모든 섹스가 피지컬 섹스일 뿐이지만, 사실은 피지컬하지 않은 플라토닉 섹스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명상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육체의 접촉 없이도 오르가즘을 느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은 본디 성적인 희열이 정신적인 자극에서 오는 어떤 것이란 점을 암시한다.



사춘기에 사랑을 해본 사람은 대부분 공감할 텐데, 손목만 잡아도 오르가즘에 가까운 전율을 느끼는 게 그땐 가능하다. 이 경우도 때 묻지 않은 정신의 소유자들이 아무런 조건이나 이해타산 없이 상대방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여서 가능한 것이리라. 이는 섹스의 본질이 육체가 아닌 정신의 교감에 있으며, 육체는 한낱 정신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점을 방증한다.



성인이 되면서 여러 가지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교감의 채널에 불순물이 끼어들면, 섹스가 육체의 탐닉 수준에만 머물기 때문에 더 이상 강렬하고 생생한 자극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각종 기구나 최음 효과를 내는 약물 등을 통해 자극의 강도를 높이려 애쓰게 되고,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남는 것은 되풀이 되는 공허함뿐이다.



그 와중에 섹스는 점차 추잡하고 허무한 행위로 변질이 된다. 매춘부와의 하룻밤이 신혼부부의 첫날밤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인 교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립과 단절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섹스라 할 만한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을 것이다. 온 세상이 성욕을 부추기는 말초적 자극으로 넘쳐나고 있지만, 정작 섹스다운 섹스는 찾아볼 수 없는 게 이 시대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이처럼 플라토닉 섹스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플라토닉과 피지컬이 결합된 완전한 섹스란 전인미답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지금 당장 모계사회로 진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모계사회의 본질을 구현해 내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은 않다. 성해방은 일종의 피상적인 결과물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소통과 연대감이 모계사회의 본질적인 속성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 개개인이 지금처럼 고립, 단절된 상태에서 섹스를 개방시켜 버린다면 아마 생각지도 않은 폐단과 부작용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소통과 연대의식을 키워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섹스 또한 원래의 건강성을 회복하지 않을까 싶다.


 


 


성욕의 딜레마



앞에서 언급했듯이 20세기 이후 대중문화와 민주주의, 성개방의 확산으로 가부장제의 폐단은 많이 해소되었으며, 인류는 모계제적인 질서에 한 발짝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본질적인 해결책에 이르진 못했기에 새로운 양상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미국인 부부의 15~20%가 1년에 10회 미만의 섹스를 한다고 한다. 한국은 아마도 훨씬 적을 것이다. 모수오족의 말마따나 ‘계절과 같이 오가는 사랑’을 미련하게 법률로 묶어 놓고, 다른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범법으로 간주한 업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도를 들킨 정치인에 관한 TV 토론에서 미국의 한 사회비평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남자가 20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하면 더 이상 아내와의 섹스를 원하지 않고, 아내도 마찬가지다. 이유야 어떻든 여기서 해결책은 무엇인가? 외도가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여생을 열정 없이 살면서, 1년에 3일 아내와 섹스를 하고 다른 사람을 상상하며 지내는 것이 해결책인가?” 어색하고도 긴 침묵 끝에 한 출연자가 입을 연다. “그렇지 않다. 정답은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내 말은 당신이 어른이라는 것이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니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가? 외도를 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는데다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가정이 파탄 나고 엄청난 후폭풍을 겪게 되는데, 미국 같은 법률 하에서는 남자가 파산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갑작스레 불붙은 관계가 언제까지고 지속되리란 보장도 없다. 자신이 순간의 열정에 사로잡혔을 뿐이고, 조강지처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음을 깨달았을 때 물은 이미 엎질러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현대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속으로 수렁처럼 빠져 든다. 외도를 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형편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그만큼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계처럼 무감각한 존재로 지내다가 가끔씩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피지컬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짝퉁에 불과한 피지컬 섹스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그 자체가 문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이렇게 위태로운 상태로 유지되는 부부 관계의 상당수가 이혼으로(미국의 경우 50%) 끝을 본다. 경제력이 있는 남자나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는 재혼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독신을 유지하겠지만 어느 쪽이든 문제는 똑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된다.


 


 


가족제도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왜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농경시대의 초창기에는 난혼의 풍습이 유지됐다. 그런데 잉여 농산물이 축적되면서 재산의 개념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곡식은 과일이나 채소와 달리 오랜 기간 원상태로 보존이 가능하다. 힘겨운 개간 끝에 마련된 농토도 재산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제인 구달의 침팬지들처럼 인간에게도 싸울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농사일은 고되고 손이 많이 가지만, 곡식을 탈취하거나 아예 토지를 강탈해 세를 걷으면 부의 급속한 축적이 가능하다. 이렇듯 육체적인 알력이 빈번해지면서 근육이 곧 권력인 세태가 자리를 잡는다.



이 와중에 여성의 위상은 추락을 거듭한다. 원래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식량이 어디에 있는지를 감지하는 능력이 중시되기 마련인데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이 인류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근력이 받쳐줘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농경 사회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남성의 목소리가 커지면 위계질서가 생기면서 억압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된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 승자 집단이 패자 집단의 재산이나 여자를 전리품으로 챙기는 일이 생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부일처제가 생겨났다는 것이 러시아의 사상가인 크로포트킨의 견해다(일부다처제는 일부일처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다). 포로로 잡은 여자들은 합의를 통해 분배가 되고, 사적인 공간에서 처음으로 섹스의 배타적인 사유화가 일어난다.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지목할 수 있는, 따라서 아버지가 한 사람 밖에 존재하지 않는 ‘불쌍한’아이가 된다. 아이의 어머니 또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 받지 못했을 것이며 일종의 소유물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배타적 혈연관계의 그룹이 바로 가족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크로포트킨이 직접 만든 이론이 아니라 수많은 인류학자들의 견해를 다듬은 가설이라 그만큼 신빙성이 있다.



섹스의 사유화는 인간관계의 불평등과 궤를 같이 한다. 즉, 가족제도 하의 배타적인 섹스는 여성이 남성의 권력에 복속하면서 시작된 병리 현상에 불과했으며 처음부터 어딘가 모르게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악취는 아직까지 깔끔하게 제거되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한 관계의 남녀가 정신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은 분명히 적었을 것이며, 어느 정도 양성평등이 구현된 오늘날에는 원래의 건강했던 섹스에 대한 감각이 대부분 실종됐기 때문이다.



여자를 노리갯감처럼 독점하려 드는 행동은 애당초 악취미의 일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무렵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던 사유재산의 목록에 살아 있는 인간을 버젓이 올려놓은 어느 뻔뻔스러운 파렴치한이 첫 테이프를 끊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 악당은 혈기왕성한 청년들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을 것이고 모방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서서히 관례처럼 묵인됐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생명체에도 특허를 발부받는 인간들이 유발하는 것과 비슷한 공분을 사기도 했겠지만 다들 조금씩 무감각해져 갔을 것이다.



결국 가족제도의 섹스는 인류가 그전까지 누려왔던 건강하고 완전한 섹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어둡고 음습하고 불완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여성이 노리갯감의 위상을 많이 벗어나긴 했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부부 관계의 본질만큼은 일만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섹스의 타락과 종교의 구원



중국이나 인도에 가면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대소변을 보는 성인을 마주칠 수 있다. 외국인들은 그 모습에 기겁을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섹스라고 다를 것은 없다. 가부장적 질서가 강화될수록 그에 비례해 섹스도 점차 은밀한 행위가 되어 갔다. 남녀가 평등하지 못하고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권력으로 누르는 상황에서는 섹스도 그만큼 강제성을 띨 수밖에 없으며, 정신적인 교감 또한 어려워진다. 대학교수가 조교를 성추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부분 역겨운 느낌을 받듯이, 섹스는 점차 어둡고 남부끄러운 이미지와 결부되어 갔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은폐된 공간에서 몰래 하는 행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섹스가 어두운 속성을 띨수록 윤리나 도덕관념으로 억압을 하게 되고, 억압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앞의 글에서 논했듯이 폭력적이 되어 간다. 폭력의 분출은 다시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시킨다. 부계제 사회의 폭력과 갈등, 애욕과 번민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은 결국 종교에서 해결책을 찾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부계제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몸부림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계제가 모계제로 전환된다면 종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계제와 종교 사이엔 묘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비슷한 아이러니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스웨덴 영화가 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범죄가 10년 넘게 일어나지 않자 경찰서를 폐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결국 경찰들은 살아남기 위해 범죄를 부추기게 된다. 범죄를 막기 위해 생겨난 경찰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범죄였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창설된 군대도 침략자나 적이 없으면 난감해지고, 종교 또한 부계제가 사라지는 것을 꺼리게 된다.



만일 병적인 부계제가 건강한 모계제로 돌아간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차원의 종교들은 설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병의 근원이 사라지면 치료제는 존재의 가치를 잃는다. 정작 치료제를 팔아 연명하는 의사들은 병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종교의 메커니즘을 ‘가부장제’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에서 종교를 조감할 때 오랜 세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의문점들이 하나둘씩 풀리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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