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보답은 약속이행으로 – 중국 불법 체류, 2번의 탈북, 한국 정착해서 대학원 졸업까지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2호(2015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감사의 보답은 약속이행으로



– 중국 불법 체류, 2번의 탈북,


 


한국 정착해서 대학원 졸업까지


 


김보미| 탈북민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위험천만한 떠돌이 생활을 하다



한반도 북쪽 끄트머리 동해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24살이 될 때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98년도 함경남도 영광군에 있는 간호학교에 재학중 약초방학(약초를 구해 오기 위한 임시 방학)을 맞아 귀가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약초와 휘발유(또는 경유), 그리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으려고 친언니와 동행하여 국경연선까지 갔다. 당시 북한 전체의 식량난과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집안의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웠기에 집 형편으로 학교의 요구조건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국경연선에 도착하여 간신히 중국의 친척과 연락이 되었으나 한국에 다녀온 기록으로 인해 친척이 북한으로 나올 수 없으므로 중국으로 직접 건너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친언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언니에게 10일안에 돌아 올테니 혹시 그 기간까지 기다리다 오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혼자 몰래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낯선 중국 땅에 홀로 건너갔고, 어렵게 친척집을 찾아 약간의 도움을 받아 귀국을 단행하였으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조국이라고 위험을 무릅쓰고 장마에 불어난 두만강에서 사투를 견뎌내며 조국 땅을 밟았으나 나를 기다린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침해의 산 현장이었다.



국경경비대의 작은 소대에서부터 온성 보위부까지 수차례에 걸치는 검증과정들은 충격 그 자체였고 지금껏 내가 배우고 알고 있던 그런 모습이 아닌 인간으로써의 치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처사는 나로 하여금 분노와 함께 복수를 다짐하게 했고 재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수차례 위험한 순간들을 겪어야 했고 무조건 살아야 했기에 무려 5개의 가명을 사용해야 할 만큼 삶은 늘 긴장이었다. 매 순간 매의 눈초리로 주변을 의식하며 안전을 위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는 그때부터 어느 건물이든지 출입구나 다른 문이 어디에 있는지 눈여겨보는 습관이 생겼다. 만일의 경우, 나는 그 자리에서 빨리 탈출해야하니까.



불법월경에 가난한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어린나이에 못된 일부 중국인들의 검은 속심에 휘말려 팔려갈 뻔도 했고, 위험한 상황을 피하여 도피를 한 곳이 마침 호텔에 있는 술집이었다. 또 운이 좋아 그 밤으로 도망을 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주머니에 돈이 없어 삶은 계란 한 개와 물 한 병으로 몇 끼를 굶으며 간신히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는 데까지 갈 수 있었던 순간도 있었다.



식당에서 열심히 일을 잘 한 결과 사장님의 도움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그 와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을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나는 당시 남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고향으로 다시 들어갔다. 무조건 고향에 가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갔어도 나를 기다린 것은 지옥 같은 현실이었다. 우선 북한 고향에 돌아가서 매일 반복되는 조사를 받아야했다. 나는 그 와중에 가족들에게 온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다 털어 집을 구입하게 하였는데, 탈북했다가 돌아왔다는 이유로 강제로 집을 몰수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대낮에 가족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북한이 조국이라고 기대했던 나 자신이 미련했었음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분노를 담아 중앙당에 편지를 써서 발송한 후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이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한국행을 준비하던 중 중국인의 고발로 공안국에 체포되어 50일간의 구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구류생활보다 북한에 다시 끌려가게 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있던 남편과 중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북송을 면하고 다행스럽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엔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게 한국행을 준비하였고, 마침내 중국을 떠나 태국을 통해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한국입국에 성공했다.


 



강직한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리기까지



무사히 한국에 입국하여 관련기관의 조사 과정들을 통과하고 하나원에 입소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원 과정에 충실하게 임하였다. 그 결과는 수료식에서 통일부 하나원장의 상을 수여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원 퇴소 후 보름 만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였고, 시어머니와 함께 세 식구가 서로 도우며 한집에서 생활했다. 경기도 산본에 위치한 영구임대주택을 배정받아 집이 크지 않고 낡았지만 하나하나 갈고 닦아가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결혼 전 남편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 수천만 원의 빚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직한 남편은 그 사실을 나에게 알리는 걸 창피해 했고, 함께 고생을 짊어져야 하는 현실을 알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심지어 나에게 이혼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부부가 되었으니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함께 빚을 청산해보자고 권유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정말 열심히 일을 하였고, 3년 만에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모두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결혼 초기 생계비에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내키지 않았고 자존심이 상했던 나는 남편을 향한 불평으로 이어졌다. 또 성격이 온화하지 못했던 탓에 말이나 행동에 그대로 반영되어 남편과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늘 바르고 강직했던 남편은 불같은 내 성격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인내하는 연습에 대해 가르쳐주었고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깨우쳐주었다. 또한 자상하고 정이 많은 남편은 내게 책읽기를 권했고, 특별히 올바른 인성과 시민의식을 갖춰야 할 필요성에 대해 틈틈이 가르쳐주었다.



노동의 보람, 세금 납부에 대한 자부심, 나눔의 기쁨, 사랑실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정도를 따라 소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내게 보여줬다. 배움을 통해 나는 알아갔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보다 실천을 행하는 삶의 귀중함을 깨달았다. 나는 중국과 북한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고, 마치 덤으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현재의 삶에 대해 매 순간 감사함을 느꼈다.



매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노력의 결과들은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선물해주었다.



한국에서의 사회생활 첫 발은 탈북으로 인해 멈춰진 나의 과거시점인 간호학교시절로 되돌렸다. 나는 안양에 있는 한 간호학원에 다니면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어 실습으로 나갔던 병원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직원으로 채용되어 근무하게 되었고, 개인 사정으로 이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개인병원으로 옮겼다.



안양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을 잘 대해주고 직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관계로 출근하여 3개월 만에 실장직함을 부여받아 정직원으로 근무하였고 병원운영에 많은 성과를 남겼다. 하지만 다시 용인으로 거주지가 변경되어 부득이하게 병원을 옮겨야 했고, 곧 수지에 위치한 병원에 취업하여 그곳에서도 직원들의 롤모델로 업무능력과 대인관계를 인정받았으며 환자들도 늘 밝고 긍정적인 내게 좋은 평가를 해주었다.


 


 


감사에 대한 보답은 약속을 실천하는 것



하지만 곧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병원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도 떠나는 나를 병원 식구들은 많이 축복해 주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후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는 남한의 대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다. 자원봉사와 다양한 활동에 열정을 쏟은 결과, 총장의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학업에도 성실히 임했으며, 교환학생 과정도 잘 마무리하고 좋은 인연을 맺어서 많은 인적자원을 확보했다. 학점은 항상 평균 A+ 유지를 목표로 주경야독했으며 결과는 학업과 대학생활 전반에 걸쳐 타인의 모범이었음을 인정받아 졸업식에서 총장특별상을 수여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생활 기간 동안 학업에 집중하는 동시에 다양한 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참여했고, 국내외를 다니며 많은 경험을 하고 나누었으며 대학원 입학 후에는 여러 연구에도 직접 간접적으로 기여를 하였다.



연변 과학기술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고, 중국접경지역의 국경연선을 따라 탈북경로 탐방과 특강을 통해 학생들에게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이스라엘 이주민 정착 지원센터 방문 등을 통해 사명감을 갖게 되었으며, 연구에 필요한 귀한 인적자원들을 얻어낸 것은 참으로 값진 성과였다.



또한 틈틈이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남한 사회를 익히고, 탈북여성을 남한 사회에 알리는 일들을 하였다. <여성들의 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여인지사)>에서 진행하는 남북여성합창단 ‘여울림’의 멤버로 1기부터 참여하여 남북 여성화합, 친목 도모에도 앞장섰다. 북한개발지원아카데미와, 남북여성대화마당, 통일지도자아카데미, 크리스토퍼리더십교육 등 다양한 교육과정에도 성실히 임하여 개근상, 금장을 수여받았다.



꿈에 그리던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곧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원의 학비 마련은 탈북자들에게 있어 쉽지 않은 고액이고 배우고 싶지만 등록금 마련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고맙게도 나는 입학 후 학교와 여러 외부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학비마련에 걱정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물론 학부 때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돈의 유혹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전액장학금에 학습지원금 생활비 지원까지 해주겠다고 하는 재단도 있었으나 내 삶의 모토인 “후회 없는 선택을 하자.”라는 내 안의 목소리를 따랐다. 나의 소신이나 독립성을 저해하는 돈의 유혹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어떤 재단에게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통일을 위한 일에 조금이나마 연관성이 있는 곳은 자비와 지원금 포함해서 아끼지 않고 투자하여 직접 탐방하여 많이 보고 배우려 노력하였다(독일, 두바이, 스위스, 스페인, 영국, 오만, 이스라엘, 프랑스를 탐방하였다).



대학원 재학 중에 근면함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이화여자대학교 종합사회복지관 사례관리팀에 계약직으로 채용되어 근무를 하였다. 여기서 나는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면서 조직과 조직문화를 이해하고 동료 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얻었으며 북한이탈주민들 사례관리를 통해 사회복지사의 가치관과 태도에 대해 재정립하였다.



이 모든 과정들은 늘 바른길로 이끌어준 남편의 사랑이 있어 가능했고, 활동에 함께 참여한 고마운 분들과 교수님들의 지도와 인도가 있어 가능했다.



한국생활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고, 20여 개 나라를 돌아보았다. 또한 빚을 청산하고 안정된 우리 부부의 통장에서 자동이체로 나가는 후원금액수가 매월 20만원 가까이 된지도 벌써 수년째다.



“잘 살고 있는 걸까?” 자주 반문해 보는데 그저 모든 것이 꿈만 같다.



97세의 어머님이 요양원에 계신지도 6년이 되었지만 해외에 머무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거의 매주 1회 방문하여 어머니의 상태를 체크하고 손발을 만져드리고 얼굴을 닦아드리고 안아드리고 온다.



치매에 걸리셨지만 감사하게도 어머님이 나를 향해 웃어주시면 세상일에 지쳤던 피로가 다 가시는 것 같다. 어머니는 해맑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감정 표현도 솔직하시다. 그런 모습이 내게 지금의 모든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재충전의 선물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껏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감사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노력해왔으며 앞으로도 매순간 충실히 책임지는 삶을 살고자 한다. 나는 누군가와의 약속을 꼭 지키려하고, 나아가 내가 받은 사랑에 충분히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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