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혼합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2호(2015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문화혼합


 


심규한| 시골살이 여행학교 길잡이


 


 


세계자본주의 시대에 문화혼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현대사회는 교통의 시대다. 교통은 우선 공간을 단축시킨다. 처음 교통에 의한 단축 효과는 하드웨어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다를 건너는 배에 의해, 철도를 달리는 기차에 의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의해,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에 의해 인류는 공간을 단축시켜 왔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전기와 전파에 의한 정보교통, 특히 인터넷의 단축 효과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시간의 단축으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적 시공관으로 볼 때 공간과 시간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기계의 효율성에 의해서 뿐 아니라 정보의 재현 기능에 의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한 공간에서 홀로그램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통에 의한 단축으로 문화혼합현상이 생기고 있다.



긴 시간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문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논리에 의해 백화점식으로 진열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마치 백화점에서 옷을 선택해 사 입듯, 라이프스타일을 혹은 취미를 선택한다. 나는 켈틱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고, 불교를 좋아하며, 아나키즘적 세계관을 좋아할 수 있다. 음식은 채식주의자로서, 옷은 아무렇게나 입을 수 있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할 수 있고, 일본만화 매니아일 수 있다. 아프리카의 조각에 빠져 있을 수 있고, 자동차 엔진에 열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문화혼합을 풍요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세계자본주의 사회의 생활양식으로 부를 수 있겠지만, 결코 자본주의사회의 게임 규칙을 돌파할 수 있는 주체 내지 자유가 될 수 없다. 상품으로서의 문화와 다르게 우리는 생태로서의 문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외도 있겠지만, 비유컨대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생태 문화는 상품 문화의 뿌리라는 점에서 원문화일 것이다. 애초 문화는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며 인간 종족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생활방식을 통칭하고, 그런 점에서 문화는 생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하라사막의 투아레그족 문화와 안데스 산맥의 안데스 문화, 북극권의 이누잇 문화 등 문화는 환경과 인간 교섭이 반복하고 순환되는 피드백 고리를 이룬다. 따라서 문화는 저마다 다르며 각기 필연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문화가 저마다 다르다는 점 때문에 문화는 호기심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때 그것은 이질 문화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호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좋을 호(好)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은 본능이다. 같지만 다른 상대에 대해 우리는 호감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이성에 대한 호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서 타인에 대한 호감으로 강화된다. 인간은 타인에 관심이 많다. 타인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이질 문화를 혐오하고 말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직면하게 된다. 당장 문화(culture)가 발전한 문명(civilization)의 문화에 대한 태도를 보자. 도시 내지 국가와 분리하기 어려운 문명은 이질 문화에 대해 야만(barbarian)의 이름을 붙이고, 이질 문화 제거의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아마 이질 문화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거나, 혹은 권력의 지배와 영속을 꾀하기 위해 타자를 동화하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문명의 도시는 또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시장의 기능이다. 시장은 이질적인 것들의 교환 혹은 교통을 생명으로 한다. 즉 시장의 목적은 이질성 교통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시장은 합당한가? 아니다. 그것은 뿌리 문화를 상품화에 의해 제거하며 벌어진 이미지 교환일 뿐이다. 그것은 애초 문화가 갖고 있는 생태적 성격이 아니라 생태적 환경을 착취하며 자본 축적을 강화하는 일방적 패권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자본주의는 성격상 제국주의와 침략주의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반생태적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은 시스템이다. 자본이 지향하는 무한성장이란 과잉증식에 의한 파국이라는 생명현상과 닮았다. 발전이란 자연적이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반생태적이다.



문화혼합이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면 나는 그것을 환영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의 소비 행위에 불과하다면 문화혼합을 공허한 것이라 부르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태적 문화, 즉 환경에 뿌리를 내리며 적응한 뿌리 문화에 대한 존중과 건설일 것이다. 참된 문화는 언제나 생태적 합성이 있다. 이에 반해 뿌리 없는 문화는 화병에 꽂은 꽃들처럼 화려하지만 공허한 문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니힐리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의미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문화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문화란 진정 무엇인지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문화가 진정 무엇인지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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