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징비록’인가?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2호(2015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왜 지금 ‘징비록’인가?


 


김동민|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조일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이 KBS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드라마에 앞서 2003년 이후 여러 권의 ‘징비록’이 출간되었으며, 올해 들어 세 곳 출판사에서 소설 형식의 ‘소설 징비록’을 내놓았다.



징비는 『시경』의 끝부분에 나오는 소비(小毖)라는 제목의 시의 서두에 해당하는 “엄혹한 일을 당하니 다가올 환란을 삼가하여 경계하려 한다.(予其懲而毖後患)” 라는 구절에서 딴 말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대비하지 않아 곧 바로 병자호란을 겪었고, 그 후로도 삼가지 않아 결국 나라가 망했다. 이렇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징비록’이 4백여 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1995년 501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2003년 192명의 사망자를 낸 대구 지하철 참사, 그리고 대부분 앞길이 구만리 같은 어린 학생들인 295명의 사망자를 내고 아직도 9명이 차가운 배안에 갇혀 있는 세월호 참사의 현실 등을 비추어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더불어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민경제의 현실에서 부자감세와 서민증세를 강행하는 정부의 처사가 복기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보도참사가 곁들여진다. 이게 나라냐, 하는 탄식이 나오는 현실인 것이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은 적이 없다



율곡은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상소로써 아래와 같이 나라의 꼴을 질타한 바 있다. 오늘의 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오로지 날로 더 썩어서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그 집과 오늘의 나라꼴이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다 해서 방치한다면 100가지 폐단이 날로 더하고 하는 일은 날로 실패해서 백성들의 삶은 날로 힘들어지고 마침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야말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드라마 ‘징비록’에도 소개되었던 사화동에 대한 심문 기록도, 없는 벌이에 세금으로 건강보험료로 뜯기고, 견디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세 모녀와 같은 서민들의 심정과 닿아 있다.



“어찌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왜구의 앞잡이가 되었느냐?”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은 적이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먹고살기 위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도미도 잡고 전복도 잡았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잡기만 하면 공물이다 진상이다 해서 다 뺏겼다. 종당엔 왜구에게 붙들려 일본까지 끌려갔다. 끌려가는 동안 나를 위해 어느 한 놈 나타나 주지도 않았다. 불쌍한 내 마누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너희 놈들이 사람이더냐? 역적의 여편네라고 너희 놈들이 못살게 굴어 어린것을 업은 채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래, 이게 나라의 은혜란 말이냐?”(이번영, 『소설 징비록 1』, 나남, 278쪽)



‘징비록’에는 전쟁의 근인(近因)에 대해 밝혀놓았지만 보다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원인이 있었다. 태종 이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던 조선은 세조 때 계유정란의 공신들인 훈구파가 왕권을 등에 업고 득세하게 된다. 그러던 것이 성종 시기에 이르면 훈구파의 세력이 약화되고 사림세력이 등장한다. 도학정치를 실현하려던 성종이 사림파를 등용, 훈구파를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결과였다.



사림 세력은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으로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언로(言路)를 담당하는 3사에 근무하면서 활동하였다. 사림은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 중종 때 조광조를 제거한 기묘사화를 겪으며 흔들렸으나 선조 때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중용된 후 소위 붕당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이는 외척 중심의 척신정치를 종식시키고자 했던 선조의 선택이었다.



선조가 율곡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전란을 맞은 후 왜군을 피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등 비판받을 요인은 제공했지만, 전쟁의 주요 원인을 선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국내외의 구조적인 요인이 중첩된 가운데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총체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조선은 고려의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사유화하고 있던 것을 몰수하여 과전법을 시행한 후 양인농민들의 지위가 향상되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는 등 전반적으로 성종 때까지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생활이 다시 어려워지게 됨에 따라 도적이 되거나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명종 때 임꺽정의 난이 일어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다.



한편 사림의 붕당정치는 장차 서로 견제하며 정권이 교체되는 정당정치로 발전할 수 있는 씨앗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에서 보더라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붕당정치가 시동을 건 시점에서 외침을 당한 것이다. 사림들이 담당했던 언로의 역할도 성리학의 명분론에 집착하는 가운데 왕권을 견제하는 데 국한하여 경세제민에 이르지 못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율곡도 하다하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퇴계와 남명이 관직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산 까닭이 아니었겠는가?



일본은 유럽의 봉건제와 매우 유사한 조건에서 봉건영주들 사이에 100년간의 전쟁을 치르다 오다 노부가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유럽의 절대왕권국가와 같은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 그 사이 유럽은 대항해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일본과 교류하였고, 카톨릭과 더불어 조총이 유입되었다. 경제력과 군사력(육군)이 앞선 일본은 히데요시의 정치적 야심과 봉건귀족에 해당하는 다이묘들의 경제적 욕구가 결합하여 조선 침략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성리학에 입각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학정치와 걸음마단계의 붕당정치가 일본의 정세에 대한 판단력과 경세제민에 대한 감각이 부재한 가운데 군사적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이나 선비들이 성리학과 중화사상에 취해있으니 일본과 청을 오랑캐로 여기며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지만 나라의 기강은 이미 무너졌던 것이다. 그리고 언론3사라는 게 오늘날의 언론기관과는 달라서 소위 환경감시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오늘에 대입해보면, 정부는 부패한 가운데 경세제민의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심화되는 가운데 개선의 희망이 없고, 군의 기강은 무너져 내리고, 일본은 호시탐탐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노리고 있으며,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아무런 지혜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와중에 지금의 언론은 조선시대 사헌부나 사간원만도 못한 모습이다. 류성룡 같은 기개 있는 선비나 이순신 같은 믿음직한 장수도 없고, 전란을 당했을 때 의병으로 나설 사림이나 농민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라도 징비(懲毖)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The author didnt add any Information to his profile yet

  • Published: 403 post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