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도(道) : 영원토록 잊지 아니함!(永世不忘)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2호(2015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억의 도(道) :


 


영원토록 잊지 아니함!(永世不忘)


박길수| 본지 주간


 


동학의 본질은 잊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잊지 않는가? 한울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한울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한울님은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울님을 천지부모(天地父母)라고 말한다. : “천지부모를 길이 모셔 잊지 않는 것을 …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고 극진히 공경을 다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된 도리이니라(天地父母永侍不忘 … 至誠至孝 極盡極敬 人子之道理也, <해월신사법설 – 천지부모>).” 한울님을 모시는 방법은 그러므로 ‘부모와 더불어 한가지 섬기는 것(與父母同事)’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경신년(1860) 4월 5일 한울님의 말씀으로 동학을 창도/득도한 이후 한울님의 말씀(이치)/가르침을 헤아려 정리한 것이 동학의 21자 주문인데, 주문은 ‘강령의 법[降靈之法]’과 ‘잊지 않는 글[不忘之詞]’로 이루어져 있다. :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論學文>)



강령의 법은 ‘강령주문’이라고도 하고, 잊지 않는 글은 ‘본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영원’은 ‘사람의 평생’을 말하고, ‘잊지 아니한다’는 것은 ‘생각을 보존[存想]한다’는 뜻이다[不忘者 存想之意也, <論學文>].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만사지(萬事知)”가 스물한 자 주문의 체언(體言=부뚜막의 소금)이라면 영세불망은 용언(用言=집어넣기)이다.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주로 시정지(萬事知)만을 말하는데, 영세불망이 아니면 그 체(體)가 활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聖人=君子)에 이르느니라. 동학을 한 글자로 줄이면 모심[侍]이라고 한다. 모신다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論學文>]”이로되,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은 곧 그 본체를 잊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왜 잊지 말 것을 강조하는가? 이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하며, 불의와 부정의가 넘치는 이유는 동귀일체(同歸一體)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을 망각(忘却)하고 각자위심(各自爲心)의 현실을 진실로 착각하는 무지와 물욕이 넘치기 때문이다. 한울님을 만나는 방법, 한울님을 모시는 방법은 바로 그 근본(동귀일체 한울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 “가련(可憐)한 세상 사람 각자위심(各自爲心) 하단 말가. 경천순천(敬天順天) 하여스라. 효박(淆薄)한 이 세상에 불망기본(不忘其本) 하여스라(<勸學歌>).” 그러므로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동학을 공부[修煉]하고자 한다면, ‘참에 돌아가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해에 잠기어 마음에 잊고 잃음이 많았음[未曉歸眞之路 久沉苦海 心多忘失, <祝文>]’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동학은 심학이니, 그 뜻을 잊지 말라



동학의 다른 이름은 심학(心學), 즉 마음공부하는 것이다. ‘동학공부’ ‘동학함’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동학은 심학이니, 그 뜻을 잃지말라[不忘其意, <敎訓歌>]고 하셨다. 마음공부를 해서 무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군자(君子)가 되자는 것이며, 동귀일체의 세상을 이루자는 것이다. : “군자의 덕은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하고 소인의 덕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명에 어기나니….[君子之德 氣有正而心有定故 與天地合其德 小人之德 氣不正而心有移故 與天地違其命 此非盛衰之理耶, <論學文>]”



수운 선생은 도(道, 東學)을 공부하는 기본 자세가 이 ‘잊지 않음’에 있음을 간절히 깨우쳐 말씀하셨다. ;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내 경계 하는 말씀 세세명찰 하온 후에 잊지 말고 지켜내어 성지우성 공경해서 한울님만 생각하소. 처자 불러 효유하고 영세불망(永世不忘) 하여시라(<勸學歌>).”



해월 선생은 다시 이를 자세하고 친절하게 풀어 말씀하셨다. ; “내가 젊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수운 최제우)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중략) 여러분은 내 이 말을 터득하여 스스로 굳세게 하여 쉬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나는 비록 통하지 못했으나 여러분은 먼저 대도를 통하기 바라노라(<海月神師法說, 篤工>).”



또 말씀하셨다. : “아이가 난 그 처음에 누가 성인이 아니며, 누가 대인이 아니리오마는 뭇 사람은 어리석고 어리석어 마음을 잊고 잃음이 많으나, 성인은 밝고 밝아 한울님 성품을 잃지 아니하고, 언제나 성품을 거느리며 한울님과 더불어 덕을 같이 하고,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크고,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화하나니, 천지가 하는 바를 성인도 할 수 있느니라[兒生厥初孰非聖人孰非大人 衆人蚩蚩心多忘失 聖人明明不失天性 仍以率性 與天同德與天同大與天同化 天地所爲聖人能爲, <聖人之德化>]”


 


 


어떻게 잊지 아니하는가? 심고(心告)와 식고(食告)



잊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심고(心告)하는 것이다. 심고는 어떻게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매매사사, 일거수일투족을 한울님께 아뢰는 것이다. : “잘 때에 ‘잡니다’ 고하고, 일어날 때에 ‘일어납니다’ 고하고, 물 길러 갈 때에 ‘물 길러 갑니다’ 고하고, 방아 찧으러 갈 때에 ‘방아 찧으러 갑니다’ 고하고, 깨끗하게 다 찧은 후에 ‘몇 말 몇 되 찧었더니 쌀 몇 말 몇 되 났습니다’ 고하고, 쌀그릇에 넣을 때에 ‘쌀 몇 말 몇 되 넣습니다’ 고하옵소서. (중략) 일가집이나 남의집이나 무슨 볼 일 있어 가거든 ‘무슨 볼 일 있어 갑니다’ 고하고, 볼 일 보고 집에 올 때에 ‘무슨 볼 일 보고 집에 갑니다’ 고하고, 일가나 남이나 무엇이든지 줄 때에 ‘아무것 줍니다’ 고하고, 일가나 남이나 무엇이든지 주거든 ‘아무것 받습니다’ 고하옵소서(해월신사법설, <內修道文>).”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해 보면, 어렵지 않고(?) 그 감응(感應)은 대단히 크다. 심고 중에서도 한층 더 강조되는 것이 식고(食告)이다. 밥 먹을 때 드리는 심고라는 말이다. 해월 선생께서 삼칠자 주문을 풀어서 “주문 삼칠자는 대우주·대정신·대생명을 그려낸 천서이니 ‘시천주 조화정’은 만물 화생의 근본이요, ‘영세불망 만사지’는 사람이 먹고 사는 녹의 원천이니라[呪文三七字 大宇宙 大精神 大生命 圖出之天書也 ‘侍天主造化定’ 萬物化生之根本也 ‘永世不忘萬事知’ 是人生食祿之源泉也<靈符呪文>]”이라 하신 것도 바로 이 뜻이다.



또 “만사지는 밥 한 그릇[萬事知 食一碗]”이라는 말이 동학의 지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밥 한 그릇’ 이치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식고’함으로써이다. :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님의 젖으로 자란 줄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니라. 식고는 반포(까마귀 새끼가 어미를 봉양하는 것)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人知天地之祿則 必知食告之理也 知母之乳而長之則 必生孝養之心也 食告反哺之理也 報恩之道也 對食必告于天地 不忘其恩爲本也, <天地父母>].”



다시 해월 선생의 말씀이다. : “한울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안에 계시나니, 그러므로 만물의 정기는 한울이니라. 만물 중 가장 신령한 것은 사람이니 그러므로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니라. 사람은 태어나는 것으로만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곡백과의 영양을 받아서 사는 것이니라. 오곡은 천지의 젖이니 사람이 이 천지의 젖을 먹고 영력을 발휘케 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니, 이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원리에 따라 사는 우리 사람은 심고로써 천지만물의 서로 화합하고 통함을 얻는 것이 어찌 옳지 아니하랴(<其他>).


 


 


무궁토록 잊지 아니함 – 향아설위



삼칠자 주문에서 ‘영세(永世)’는 사람의 평생이라고 했다. 어찌 100년도 못 되는 한 사람의 평생을 ‘영세’라 하는가? 동학의 제례법인 ‘향아설위(向我設位)’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조상에게 드리는 밥을 ‘벽쪽(저세상)’에 놓지 않고, 제사 지내는 나(後孫)이 앉은 ‘이쪽(이승)’에 놓는 제사법이다. 이는 조상님(한울님)이 지금의 ‘나’에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즉, 조상의 성령(性靈)이 나의 성령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평생’은 무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란 다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 “운용의 맨 처음 기점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의 기점은 성천(性天)의 기인한 바요, 성천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하여 이때에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로부터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때에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끝나는 것이니라(無體法經 <性心辨>).”



향아설위 제사법의 요체가 바로 ‘불망’이기도 하다. : “굴건과 제복이 필요치 않고 평상시에 입던 옷을 입더라도 지극한 정성이 옳으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굴건을 쓰고 제복을 입고라도, 그 부모의 뜻을 잊어버리고 주색과 잡기판에 나들면, 어찌 가히 정성을 다했다고 말하겠는가(不要屈巾祭服 以常平服而至誠可也 父母死後 着屈巾祭服而 忘其父母之意 出入於酒色雜技之場則 豈可謂致誠也哉, <向我設位>)



향아설위의 또 하나의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심고하고 식고(食告)하는 것이 곧 제사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사업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故奉祀設位爲其子孫而本位也 平時食事樣 設位以後 致極誠心告 父母生存時敎訓 遺業之情 思而誓之可也, <向我設位>)



그리하여, 오늘날 ‘제사가 멸종되는 시대’에 천도교의 상기(喪期)는 ‘백년상’이 되며, 이때 백년은 ‘영세무궁(永世無窮)’의 뜻인 것이다. : 마음으로 백년상이 옳으니라. 천지부모를 위하는 식고가 마음의 백년상이니,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부모의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이 영세불망이요…(心喪百年可也 天地父母爲之食告曰 心喪百年 人之居生時 不忘父母之念 此是 永世不忘也 天地父母四字守之…, <向我設位>)


 


 


동학에서 불망의 도는?



다시 말하지만, 동학 공부의 요체는 ‘잊지 아니함’이다. 그 잊지 아니함은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아니함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래도 부모님을 잊지 않고 길이 모시는 길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 “이제 우리 도유는 이미 천지부모를 길이 모시는 도를 받았으나, 처음에 부모의 도로써 효경하다가 내종에 보통 길가는 사람으로서 대접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으며, 그 자식이 어버이를 배반하고 어버이를 잊어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今我道儒 旣受永侍天地父母之道 初焉以父母之道孝敬 終焉以尋常路人待之則 其父母之心 豈可安乎 其子背親忘親而安往乎, <道訣>)



해월 선생은 그래서, “죽어도 잊지 않는다”고 하셨다. : “내 눈을 붙이기 전에 어찌 감히 수운 대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으리오. 삼가서 조심하기를 밤낮이 없게 하느니라(吾着睡之前 曷敢忘水雲大先生主 訓敎也 洞洞燭燭 無晝無夜, <守心正氣>),” 다시 돌아가 이야기하자만, 밤과 낮 사이에 심고(心告)하는 것이다. 다시, 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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