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에 지치고, 고향에 돌아갈 차표는 없었다 – 탈북부터 한국 정착까지(2)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1호(2015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치고,


 


 고향에 돌아갈 차표는 없었다


 


– 탈북부터 한국 정착까지(2)



김소라| 탈북민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다



위험을 무릅쓰고 기차에 매달려서 국경까지 가게 되었지만 정작 우리가 가져간 귀금속은 안전원들에게 죄다 빼앗기게 되어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빈손으로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열차는 안 다니고 며칠에 한 번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만원 열차에 오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그곳에 있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조차 막막해지면서 우리는 량강도 혜산역 근처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 수중에 돈이 없으니 몇날 며칠을 굶어야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정말 의식이 혼미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한국에서 다시 만난 언니와 내가 늘 싱갱이질 하는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국경연선인 혜산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중국 국경이 바로 코앞이라는 것과 사람들이 많이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래지고 집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희박해지는 가운데 중국으로 건너가서 국경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왔는데 옥수수를 달라고 하면 그냥 얻을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도 접하게 되었다. 굶주림에 지쳐 점점 생각할 기력조차 잃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먹을 것을 찾아 무작정 압록강을 건너 조·중 국경을 넘게 되었다. 그곳은 백두산 아래 장백이었다.


 


목숨을 걸고 칠흑같이 어둔 밤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갔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옥수수를 얻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했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나와 언니는 예상치 않게 인신매매업자의 거짓말에 속아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중국말도 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건네주고 친절했던 어떤 아저씨였다. 우리가 중국말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들 앞에서는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하고 뒤로는 이미 우리 자매를 팔아 버릴 속셈을 한 것이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언니는 사라졌고 언니를 찾아 고향으로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낯설고 물 선 중국 땅에서 말도 모른 채 인신매매업자의 말만 듣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우리가 인신매매 업자에게 속았고 언니는 이미 전에 팔아 넘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언니와 이별한 지 1주일 가까이 된 이후였다.


 


 


중국인의 집에 숨어 9년을 살다



당시에 중국 정부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강을 건너 중국연선을 넘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중국 국경경비대를 풀어 하루에도 수차례씩 집집마다 검열을 다녔다. 인신매매업자의 손에서 벗어난 것은 매일같이 언니가 어디 갔는지 물으며 곧 만나게 된다는 그의 말만 듣고 무작정 걱정하며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에 한 번씩 자기 주변사람들의 집으로 전전하던 그가 나를 데리고 낯선 집으로 갔다. 다행이도 그곳은 내가 인신매매로 팔려 가지 않고 무사히 그의 손에서 달아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의 집이었다.



나중 알게 된 것은 그 집 아들이 나를 마음에 두고, 인신매매업자에게 돈도 주고 위협도 해서 나를 빼냈던 것이다. 그 집에는 5형제자매가 같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 나의 언니, 오빠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과 친분이 있던 인신매매업자는 그 집으로 갈 때 중국어로 그 가족들에게 나를 소개하기를 자신과 결혼하려고 북한에서 건너온 여자라고 속였다고 했다. 그 집 식구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그 사람은 돈도 없고 직업도 없이 떠도는 가난한 사람이고 우리 자매를 인신매매하여 돈을 벌려고 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에 등 떠밀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중국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원어민들로부터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나의 첫 중국어 선생님은 어린 중국 원어민들이었는데 그들은 7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뛰는 흉내를 내면 “아~뛰자는 말이야?”라고 다시 되물어 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다시 그들에게 “응. 뛰자는 말이야.”라고 하면 어린 선생님들은 나의 말에 다시 화답해 주는 식으로 서서히 익혀 나갔다.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만 익혀서는 안 되었다.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면서 그들의 언어적 습관과 문화적인 특성을 익혀 나갔다.



그들은 밥상에서 침을 뱉고, 돌아다니면서 밥을 먹었고, 심심풀이로 즐겨먹는 땅콩과 해바라기씨 같은 넛츠의 껍질을 그대로 방바닥에 버렸고 음식물도 함부로 버렸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교육받은 근검절약의 정신과 집 안팎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북한 문화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중국인들의 과감하리만치 더러운 습성들이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를 많이 보고 배우면서 차츰 중국인들의 지저분한 습성들이 이해가 되었다. 중국에서도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나도 차츰 중국인에 동화되어 갔다.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내몽골 국경에 가다



중국에서의 생활들이 차츰 몸에 배이고, 그들만의 과감하고 다소 부담스럽게 더러운 점들에 거부감을 느끼던 생활도 익숙해져 어느덧 9년에 접어들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중국 지인이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너는 북한사람인데 왜 한국으로 안 가?”라는 질문을 뜬금없이 던졌다.



“중국에서 숨어 지내지 말고 한국으로 가면 네가 가장 걱정하는 국적문제도 해결되고 얼마나 좋으냐?”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상상과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안 하고 있던 나로서는 뜻밖의 시험에 들게 된 기분이었다. 그것은 약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처음에는 부담스럽던 중국에서의 생활이 이제는 나의 일부처럼 당연스레 몸에 배어 있다는 점을 새삼 느끼며 갈등에 휩싸이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중국에서의 이뤄 왔던 모든 생활을 접고 또 다시 어디론가 홀가분하게 떠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고, 생각할 이유조차도 없었다. 북을 떠날 때에도 예상치 않게 나의 모든 생활을 접고 속절없이 등 떠밀려 중국으로 건너와, 갖은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생활하면서 이루어 낸, 나의 9년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떠난다는 것은 그리 쉽게 내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리 중국에서의 생활이 익숙할 지라도 나에게는 바람막이가 되어 줄 버팀목이 없었다. 여권이나 국적이 없었기에 일단 사소한 일이라도 벌어져 탈북자란 신분이 밝혀지는 날에는 여지없이 북송을 당해야만 했다.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이 당시로써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브로커를 수소문했고 2007년 3월 중순의 어느 날 느닷없이 떠나도 된다는 사인을 받고 나와 일행은 중국 북부 자치구중 하나인 내몽골로 향했다.



내몽골에는 브로커의 연락을 받고 이미 우리를 맞아주는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은 우리를 싣고 쉬지도 않고 중국과 몽고 국경지역까지 달려가더니 2미터가 넘게 허술하게 철조망이 쳐져있는 산턱 어딘가에 다급히 우리를 짐짝처럼 내려놓고는 철조망을 넘으면 몽골라는 말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시 일행으로 4명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 전부 여성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나이 어렸고, 나름 스포츠선수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는, 언니들을 무사히 철조망 너머로 건너보낸 뒤 마지막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몽골 국경을 밟았다(당시 시간이 새벽 1~2시경이었던 걸로 까마득히 기억이 난다). 3월 중순의 몽고는 칼바람에 살이 에일 정도였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여자 4명은 죽을 힘을 다해 걸을 뿐이었다. 우리는 무려 7시간을 정말 정처 없이 걸었다. 힘들어 쉬고 싶어도 추위에 쉴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로 동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네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고 걸으면서 여성들은 드디어 말문을 트고 서로의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우리는 국경을 넘기 전까지 우리 중 간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레 겁먹고 서로에 대해 일체 물어보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동이 틀 무렵 우리는 땅에 남아 있는 말발굽 자국을 발견하였고 그 종적을 따라가 몽골인들을 만나 무사히 난민수용소로 갈 수 있었다. 3개월간 몽골에 체류하게 된 우리는 그곳에서 별의별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몽골 국경을 넘어오다가 중국 경찰에 쫓겨 가족과 헤어진 사람, 매서운 추위로 인한 동상 때문에 걷지 못하고 일행과 헤어지게 된 사람 등 수 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았고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에 가면 함께 못 온 사람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우리의 난민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6월 어느 날 나는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하나원에서 언니를 만나다



운동을 하면서 어려서부터 나의 꿈이었고 부모님의 소원이었던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비행기는 마치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주었지만 기대에 부풀어 탑승하였다.한국 입국과 동시에 우리는 국정원 조사를 거치고 나서 바로 하나원에서 적응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원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떤 동기생이 나와 얼굴이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며 이야기를 하는데, 들어 보니 중국 국경에서 헤어졌던 언니 같았다. 가슴 조리며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는데 문으로 들어서는 얼굴이 낯익었다. 드디어 근 10년 만에 우리는 한국에서 극적으로 상봉하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언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어떤 연변족 남자를 만나 딸까지 낳았다고 했다.



하나원에서 지낸 3개월의 기간은 자유를 꿈꾸는 우리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나원은, 한국에서는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도전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취지의 교육을 시켜주며 한국생활 적응에 있어 걱정만하고 있는 우리들의 사기를 고양시켰다.


그런 교육 과정 속에서 나도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계도 해 보고, 꿈을 이루는 과정에 대해 알아 보며 실천으로 옮길 각오를 다졌다.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는데, 학업을 중단한 지 10년도 지났고 학창시절에도 운동을 하면서 학업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던 터라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걱정만 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무작정’ 저지르고 실천에 옮겼다. 시작하면 끝을 보는 나의 성격대로 나의 대학교 생활이 그렇게 무작정 시작되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지금껏 우리는 꿈을 꿀 수조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여기에서 처음 듣는 것처럼 새삼스레 다가와 나의 뇌리에 꽂혔다. 꿈을 꾸며 한국에서의 첫 10년 계획을 세웠다. 대학교를 마치는 것과 동시에 내가 여지껏 경험할 수 없었던 세상을 최대한 많이 알아가고 돌아보려는 꿈을 꾸며 실천해 나갔다. 사회 경험을 통해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들을 동시에 경험하였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주중에 저녁6시부터 새벽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의 하루하루는 시간을 나누고 쪼개어도 모자랄 정도로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주로 김밥 집에서 김밥 마는 일을 하였다. 오랜 시간 서서 김밥을 말다 보니 허리가 온전하지 못하다. 어느날은 꼼짝없이 못 움직이고 하루종일 누워 지내야만 하는 일도 있다. 그보다 더 서러운 일은 다음 날 아픈 허리를 이끌고 김밥 집에 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탈북자에게 일 준 게 잘못이다.”라고 면박을 준 사건이었다. ‘탈북자’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한국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한 핏줄의 동포이며, 나도 대한민국 사람이다.”라고.



한국에서도 역시 정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나쁜 일도 당했지만, 좋은 일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1단계 목표로 잡았던, 세상을 최대한 알아가고 돌아보려던 꿈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시며 바다 건너 일본에 나의 고향이 있다며 눈시울 적시시던 부모님. 그분들을 대신하여 일본을 수 차례 다녀왔다. 태국도 수 차례 다녀오며 새로운 나라를 알아갈 수 있었고, 북한에서는 원수의 나라였던 미국에도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단계 목표로 잡았던 4년제 대학을 무사히 마쳤고 지금은 또 다른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렇게 바라던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대학원 과정도 마치려고 한다. 그렇게 나는 한국생활을 정착해 나가고 있고 지금도 적응과 첫 10년 계획은 진행형이다. 나는 한국 정착에서 꿈을 꾸었기에 길을 찾았다. 그 길 위에서 차근차근 목표를 세웠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목표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노력하는 과정 없이 결과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나의 정착과정과 나의 목표는 지금도 진행형이며 첫 10년이 지나도 나의 계획이 여전히 진행형일지도 모르겠다. 에돌아서 갈지라도 목표를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나는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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