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은 끝나지 않았다(2)- 유기농 농사와 함께 하는 농촌목회 이야기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1호(2015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농촌은 끝나지 않았다



– 유기농 농사와 함께 하는


 


농촌목회 이야기


 


이세우| 들녘교회 목사


 


 


 


 

 


1. 농촌목회를 시작하기까지


 


1980년대 농산물 수입개방이 본격화된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이 우리 농업을 지배하면서 농업해체·농촌붕괴·농민분해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와중에 199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농촌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평소 노동목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농촌에 대한 현실과 상황을 외면하기에는 주변의 여건들이 한가하지 않아 농촌목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내 이런 관심은 노동자와 함께하고자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진로를 농촌 쪽으로 바꾸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농촌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조건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큰 갈등과 고민 없이 즉시 짐을 챙겨 농촌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목회 현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두렵고 떨렸던 것은 감출수가 없다. 20년 전의 일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아 그 당시 기록을 들쳐보니 매우 비장한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기억하게 되었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지 우왕좌왕하지 않고 차근차근 목회를 감당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할 것 같아 농촌목회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목회방향의 큰 줄기를 잡고 목회를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5년 전, 젊은 날 세웠던 방향은 지금도 큰 변화 없이 나의 목회를 지탱해 주고 있다.  또한 최근에 새롭게 깨달은 목회철학이 있기도 해서 이를 중심으로 나의 농촌 목회 이야기를 두서없이 풀어 가고자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눈앞의 개발과 성장에 매몰되어 4대강 사업, 구제역 사태가 발생하였다. 생명보다는 돈만을 추구하면서 세월호 등의 문제가 터지고 더 이상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넘쳐나고 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처럼 아우성치는 신음소리가 방방곡곡 걷잡을 수 없이 울려난 적이 없다. 우리가 이 피조물들의 고통의 절규에 무관심하다면, 머지않아 우리 모두와 온생명에게 돌이킬 수 없는 어두운 미래가 올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 스스로가 크게 결단하지 않고는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점에서 URI-KOREA(United Religion Inititives of Korea; 한국 종교연합선도기구)가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여기까지 제 74차 평화포럼을 이끌어 왔고 다양한 종교현장에서의 사례 발굴은 물론 학문적 연구와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개발하여 보급하여 온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이렇게 한 해 두해 서로의 지혜와 경험을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나누다보면 각 종교의 터전에서, 가정에서, 현장의 삶 속에 작고 구체적인 실천활동과 성과들이 이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개발과 성장일변도의 문명에 대해 비판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생명과 평화의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는 활동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나아가 우리의 이러한 노력이 책임 있고 신뢰받는 종교활동으로 인정받아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운동이 샘솟듯이 솟아나고 겨자씨와 누룩처럼 확산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이미 많은 이론과 담론들이 있었다. 여기서는 사례를 중심으로 그 동안 활동해 왔던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생명평화 활동이 온전한 ‘URI-KOREA’가 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나 스스로도 자기성찰을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 땅의 종교인들이 모두 이윤과 성장, 그리고 착취의 구조에서 벗어나 생명평화의 생각으로 전환하여, 이 땅의 창조질서가 더 아름답게 되길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생명을 지키고자하는 이들을 아끼시며,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을 더욱 풍성케 해 주실 줄로 믿는다.


 


 


2.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목회활동


 


우리 사회는 농촌사회에서 급속도로 산업화 되었다. 곳곳에 공장이 생기고 길이 뚫리고 개발물결이 몰아쳤다. 인구는 도시로 몰렸다. 도시는 고도성장으로 탈바꿈되었다. 농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큰 변화의 물결이 농촌에도 몰아 쳤다. 농촌을 해체하고 분해하는 가운데 한편으로 농업시설이 기계화, 집단화 되면서 대량생산으로 이어지는 현상도 이때부터 발생했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물질문명의 극대화, 성장과 발전 모델만이 추구되었고 삶의 존재가치가 되었다. 이런 도시문명, 물질만능주의는 인류의 미래와 행복을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오히려 자연환경과 사회환경, 그리고 인간의 내면까지 파괴시키며 불안의 그림자만 남기게 되었다. 혹독한 경쟁만을 불러일으키며 비인간화 된 삶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급기야 생태계 전체를 교란시키며 인류의 미래. 지구 환경의 지속성에 의심을 갖게 했다.



결코 멈출 수없는 발전과 성장의 자본 속성은 자연의 이치를 무시하고 결국 환경파괴와 생태계의 교란을 불러일으킨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장과 발전의 사회모델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 그 결과로 공기와 물은 오염되고 땅은 몹쓸 땅으로 변하게 된다. 농사의 기본조건인 땅과 물, 그리고 공기가 오염된 조건에서는 어떤 농사도 가능하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 강력한 농약과 단위가 센 비료가 요구된다. 이를 다시 투여하는 것은 땅과 물에 오히려 단위가 센 항생제만 투입하는 것으로 땅과 물이 죽어가는 것을 잠시 연장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여기에서 나온 농산물은 인간에게 유익한 건강한 농산물이라 할 수 없다. 농산물을 먹고 건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을 얻는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농촌에서 자연 순리를 거스르며 악순환 되는 농사방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서 도전하는 행위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계를 회복하고 지키는 농촌목회를 하기로 기도를 드렸다.


 


 


1)견습농으로 농사일을 열심히 배우다



처음 농촌교회에 발을 들여 났을 때 교회가 밭과 논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자주 떠나는 이유가 목회자 사례비를 제 때에, 그리고 충분히 드리지 못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갖고자 논과 밭을 구해놨다는 것이다. 농지를 통해 안정된 수입원을 확보하면 교회 재정운영에 도움을 받을 것으로 여겼고 이것은 목회자가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기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농지를 구한지가 10년이 넘었지만 교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논밭이 수행하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 운영의 애물단지로 취급받고 있었다. 밭 200평과 논 8마지기 1600평에서 나온 수입금은 생산비나 건지면 다행이었고 그마저 해마다 농사짓는 문제로 교인들 간의 갈등만 유발할 뿐이었다. 결국 교인들이 운영하는 논밭은 소작형태로 개인에게 농사를 넘겼고, 얼마 되지 않는 소작료를 받아 교회운영에 보태고 있는 실정이었다.



교회 논밭의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지주가 되어 소작료를 받는 모습은 이유가 어떻든 간에 교회답지 않은 모습이라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고, 교인들도 교회논밭 관리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리 없이 목회자인 내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다. 내가 교회 논밭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까 걱정스러워 하시는 마음도 있었지만 대체로 대견해 하시는 것 같았다. 교회에 오기 전 목회활동을 하면서 농사활동에 직적 참여 해 농사를 짓는 것이 나의 기도제목이었다. 그리고 목회활동과 농사활동이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에게 있었다. 농사가 목회고, 목회가 농사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기도응답이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왔다. 그리고 교인들도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다. 사실 농사 질 마음은 있어도 농사경험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교인들의 입과 손짓을 통해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첫 해에 내가 한 일이라곤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힘쓰는 일 말고는 별로 한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거치적거리며 농사일을 방해나 하고 손해만 끼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두해를 교인들과 마을어른들을 쫓아다니며 농사일을 배우고 익혀, 3년째 들어서는 내가 모든 일을 맡아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이 때 우리지역에서 처음으로 논농사에서 못자리를 따로 하지 않고 논에다 직접 씨앗을 뿌리는 직파를 실시했다. 노인들만 계셔 앞으로 계속 일손이 딸리는 농촌에서 해볼 만한 방법이라 여겨 시작하게 되었는데 직접 다니며 손으로 뿌리는 방식이 되다보니 결손율도 많아 동네 분들이 처음에는 관심을 보여주시더니 나중에는 호응해 주시지를 않았다.



이를 계기로 동네 분들을 떠나 전국적으로 벼농사에 고수인 분들을 찾아 나섰다. 여러 지역을 찾아 많은 전문가와 고수들을 만나 이론과 경험을 듣고 실제로 농사체험들을 해 보았다. 이분들을 통해 농사기술보다도 농사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농사에 대해 자식농사·생명농사라 하는 까닭을 어렴풋하게나  알게 된 것 같다. 선무당 3년에 걸친 농사 견습생은 다시금 농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농사방법에 임하게 한다.


 


2) 끝나지 않은 풀과의 전쟁, 유기농 농사 짓기



자주 만나던 농민회 회원 농민들은 쌀 농사방법에 대해 소득 증대와 대량 생산 쪽에 많은 관심과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농가부채, 식량위기에 따른 식량무기화시대를 대비하여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식량증산 밖에는 현재로선 없다고 했다. 그리고 농촌이 못사는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열심히 아스팔트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면서 함께 행동을 했다. UR싸움, WTO싸움, FTA싸움 등 농민의 권익과 생존권사수를 위해선 누구보다도 앞장서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나긴 싸움 속에서, 그리고 장차 그 싸움에서 승리를 이룬다고 해도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 걱정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싸움의 성과와 보람도 혹시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다. 그 걱정이라고 하는 것은 땅과 물, 공기가 다 오염되어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면 배부른 식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의 요구와 미래의 걱정을 담아 함께할 수 있는 농사방법을 찾고자 고민을 하게 되었고 유기농 농사법을 따르게 되었다. 언제나, 끝까지 거리와 투쟁의 농민회와 함께하며, 또한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농민들을 함께 섬기고자 하였다. 이 두 입장이 현장에서 가끔씩 갈등관계를 보이며 충돌하며 대립할 때도 있었고 서로 그러다 보니 모두 훌륭하신 농민들인데 서로 간에 거리감들이 깊어지는 것을 보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살펴보면 둘 다의 입장이 틀린 것이 아니고 서로 차이가 날 뿐인데 왜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걸까? 이런 염려에서 가급적 이 둘의 간격을 좁혀 놓는 것이 내 역할이라 여겨 부단히도 애썼던 기억이 난다.



유기농 농사를 짓기로 결정하고 이곳저곳 다시 방문하여 공부를 하고, 이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마련하고 드디어 농사 4년차에 첫 시험 농사를 짓게 되었다. 오리 농법과 우렁이 농법 중에 우리 논 조건에 맞는 우렁이 농법을 선택했다. 우렁이 농법 첫 해에 큰 어려움은 발생하지 않았다. 소출도 별로 줄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 해인 2년차부터 발생했다. 우렁이가 졸았던지, 자기 역할을 게을리 했던지 규정에 맞게 우렁이를 넣고, 우렁이는 활동을 활발하게 한듯한데 논의 풀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차올랐다. 몇 번의 풀베기를 했어도 전혀 표시가 나질 않았다. 저만큼 풀메기를 하고나서 뒤돌아보면 어느새 또 풀이 나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 다음 해도 풀은 잡히지 않았다.



풀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 졌다. 도중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 해는 손댈 것이 없을 정도로 우렁이 농사가 대성공을 이룰 때도 있다. 그래서 기특한 우렁이를 보호하고 우렁이 가격을 아끼기 위해 가을 우렁이를 잡아 들여 겨울동안 우렁이가 죽지 않도록 우렁이를 키웠던 생각을 떠 올려 보니 참 그 당시는 열정이 대단했었음을 느끼게 된다. 우렁이가 겨울을 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경비, 자재, 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풀과의 싸움은 유기농 15년째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풀과의 전쟁이나 싸움이 아니라 놀이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교회 논과 밭은 그때부터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지금껏 농사를 짓고 있다.


 


3) 직거래 운동과 도농 교회간의 자매결연 운동



한국농촌의 문제 중 또 하나는 농산물 가격이다. 가격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늘 널뛰듯하고 대부분 생산비도 건지지 못할 때가 많다. 농사를 지어봐야 늘 손해만 본다는 인식이 가득 차 있고, 이것은 안타깝게도 사실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땀 흘린 만큼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하고 손해만 보는 이유는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판매 방식에 있고 거래처를 안정되게 확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농산물을 생산해서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되는데 꽤나 많은 단계를 거치게 된다. 물량조절도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생산량이 줄어도 가격은 꿈쩍도 하지 않고 조금도 반영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 해 농사가 잘돼 물량이 증가하면 여지없이 가격은 폭락하고 만다. 이런 불합리한 농산물 가격을 지켜보면서 이를 극복해보고자 직거래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농산물거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와의 자매결연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역에서 직접 주문을 받아 배달을 다니곤 했다. 그러나 이곳 전북 지역의 도시는 농촌과 가까이 위치해 있어 가족 및 친척 등 직접 생산자와 연결이 된 교회와 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한두 해는 담임목사와의 관계나 교회 관계 등으로 어쩔 수 없어 판매를 해 주었지만 계속 지속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안전한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이 자매결연 사업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농산물만을 거래하고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 믿음 안에서 영적인 교류를 하고 서로 이해하며 함께 상생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촌도 살리고 도시도 살려 함께 잘 살자는 운동이었다. 전북에 있는 우리교회는 서울에 있는 향린교회와 13년 전에 자매결연을 맺고 농산물 판매 및 많은 교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는 나아가 우리 기장교단의 생협매장을 추진코자하는데 기초적인 단초를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현재 생협건설을 위한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3. 거리목회와 지역목회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가 늘 폐교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전교생이 60명이 안되면 폐교대상이 된다고 해서 가까스로 53명의 정원을 유지한 학교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읍내에 있는 학교와 통합하면 버스를 대주고 각종 예산 지원을 제공하니 통합에 응하라고 각종 회유와 위협이 난무했다. 교육청과 이웃학교는 그렇다고 쳐도 학부모까지 통합에 앞장서서 찬성을 유도하는 것은 참으로 대응하기가 난처하고 곤란했다. 학교가 없어지면 동네가 적막해지는 것은 금방이고 이는 곧바로 교회학교 및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농촌의 붕괴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 것도 물론이다. 학부모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작업을 하고 아이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안심시키면서 학교 통합 반대와 함께 폐교시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민들, 교인들과 결의하고 교육청에 압박을 가해 그 해는 다행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입학생 감소와 전학생 증가로 학생들은 줄어들어 50명이 무너지더니 40명 선을 위협했다.



교육청은 다시 심의에 들어가 폐교대상을 50명으로 조정하는 대신 예외 없는 법 적용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50명을 채우기 위해 교사, 학부모, 지역 인사들이 총 동원하여 갖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교사들도 시내로 다니던 당신자녀들을 농촌학교로 전학을 시키고, 다른 학교로 다니던 학생들을 찾아 밤새 설득해 옮기게 하고, 그래도 50명의 정원을 채울 수 없어 교육청에 가 농성을 하고 그래서 겨우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0여년을 아슬아슬하게 보내고 드디어 작년에는 인원수와 관계없이 학부모들이 폐교를 바라지 않는다면 학교를 없애지 않고 유지시키겠다는 교육청의 답변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작년에 전교생은 유치원생을 포함해 30여 명에 불과하고 2명의 졸업생 밖에 없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졸업식을 마치고 올해 신학기를 맞게 되었다.



물론 이 학교를 지키는데 있어서 교회가 그 일을 주도하고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일들은 농촌목회를 하면서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주로 목회활동을 교회 내에서보다도 밖에서 더 많이 한 것 같다. 농민들 생존권 투쟁의 집회현장에 거의 빠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역에서는 물론 서울 집회에도 교인들과 늘 함께 참여했다. 여태껏 내가 앞장서서 무슨 단체를 만들거나 그 단체의 책임자를 자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거의 강요하다시피 지역일에 끌려 다니면서 이일 저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그리고 교회를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나나 교회가 활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처지로 몰려 간여하게 되지만 이왕 맡은 다음에는 최선을 다해 신뢰를 잃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편이다. 지금 지역에서 환경, 인권, 평화, 통일, 교육, 종교, 농민, 노동과 관련된 모든 각 분야에서 책임을 맡고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일이 집중되어 있어 소홀히 하는 분야도 많다. 무엇보다도 본분을 잃고 교회 일을 소홀히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비판을 받을 만하다. 옳바른 지적이라 여겨 곧 많은 분야에서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 


 


 


4. 교회 건축



이제 농촌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다. 한 번 무너지는 것은 쉬워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세운다 해도 너무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촌을 그냥 무너진 채 놔두어도 되는 것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농촌의 어려움과 멸망은 농촌 지역만으로 제한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곧바로 도시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필수적으로 도시와 농촌은 한 몸, 한 뿌리라는 생물학적이고 유기적인 특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대는 물론이고 미래로 나아갈수록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서 농촌과 도시는 구분되거나 차이가 날 수 없다는 것이 확정적인 결론이다. 전문가나 미래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도시 없는 농촌, 농촌 없는 도시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농촌은 자력으로 존재하거나 회생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생산활동에 참여하거나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을 농민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농민이 농촌의 주체고 농업의 실질적인 담당자로 여겨 왔다. 그러나 그 개념은 이제 맞지 않는다. 이 원리로는 농촌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제3의 농민이라는 개체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제3의 농민은 소비자를 말한다. 물론 그 소비자는 도시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도시인을 말한다. 즉 농산물을 필요로 하고 이를 구입해서 먹고 활용하는 소비자도 결국 넓은 의미에서 보면 농산물과 불가불 연결되어 있으므로 농민이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엄격히 구별하다보니 그 소통이 단절되거나 대상화 되어 있고 다른 계층으로 인식되어 적대적 관계로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선 그 어떤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그 어색함을 떨쳐버리고 이제 한 몸으로서 자주 만나야 한다.



이를 위해 도시교인과 농촌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시골교회로선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작은 자리이나마 마련할 수 있었다. 도시교인과 도시인들이 부담 없이 그리고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도시형태의 건물로 하면서 농촌을 느낄 수 있도록 가능한 흙과 자연을 소재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농촌에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 시설이 부족한 점을 들어 공공성 기능을 확보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고 환경위기의 시대를 맞아 친환경적이며 생태적의미를 담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요즘 한창 이야기하는 웰빙시대에 대비한 교회건축을 매우 힘든 상황을 거쳐 마련할 수 있게 되면서 농촌을 살리고 지키는데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통하여 도시사람들이 많이 오가면서 농산물이 소개되고 거래되면서 직거래 장터로서 역할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5. 노을 목회



한 때 고도성장을 이루던 한국경제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한국사회에 저성장과 양극화를 심화시키더니 최근 월가의 몰락으로 이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다. 현 정권은 한미 FTA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이를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지금도 농촌은 절망인데 가장 피해가 큰 농촌이 얼마나 더 비극적 사태를 맞아야 끝을 보겠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농촌을 지키고 있던 노인들도 한분, 두분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낮에도 적막할 뿐인 농촌에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아 있는 농촌 노인들은 외롭다 못해 서러워들 하시고 이제는 그마저도 포기하신 채 아예 말문을 닫고 계신다. 어느 날 교회 언덕에서 서쪽 하늘로 지는 태양을 보았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곳은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태양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때 강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뜨는 태양에만 관심을 보이고 찬사를 보내 왔다. 해마다 년 초가 되면 길이 막힐 정도로 동해안으로 몰려 일출광경을 보려고 장사진을 이루지 않던가? 물론 뜨는 해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는 해도 그와 못지않게 아니 그 보다도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야 서쪽하늘을 무심코 바라보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을 수 있었다.



뒤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른다.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니 천하를 얻은 듯한 느낌이다. 농촌에 노인들만 남아 계시고, 교회에 노인들만 자리를 지키고 계심이 실패요, 낙담이요, 불리한 것이 아니다.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은 희망이며 자산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느 농촌교회나 마찬가지로 노인들만 남아 계셔 교회운영에 활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마땅히 해결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것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이 위기를 농촌교회 유지나 부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일까? 하고 묻는 자체가 어리석어 보인다. 교회에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시는 노장로님을 보며 생각에 잠겨보지만 답답하기만 했는데 요사이 지는 노을을 보며 그 답을 얻은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볍다. 황혼의 아름다움, 그것은 우리 교인들의 아름다움이다. 하늘나라 가까이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서러움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요, 축복이 아니던가? 그 아름다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 나의 농촌목회의 꿈이며, 의미가 될 것이다.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추워지기 전에 노인들을 모시고 물 좋은 온천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앞으로도 기도로써, 행함으로써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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