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생각한다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1호(2015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디자인을 생각한다


 


심규한| 시골살이 여행학교 길잡이


 


디자인이라는 말에 대해 내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디자인이라는 말을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디자인은 내게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와 분리가 어려운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나처럼 디자인에 대한 유구한 편견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디자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디자인의 역사도 역사지만 개인의 경험에 기인한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처음 내 삶의 울타리 가까이로 다가온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고 잘 했지만 전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 틈나는 대로 화랑을 다니며 그림을 작품을 구경하곤 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니 진로를 미대에 두고 있던 친구가 디자인과를 지망했다.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사춘기 시절이었으니 고호 같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고독한 예술가 상에 끌렸을 것이다. 예술이란 의레 순수미술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실용미술로 분류되는 디자인은 이미 실용이라는 목적에 종속된 수단화된 예술이라는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실용미술이란 상품에게 입힐 옷을 멋지게 꾸미는 일로 여겨졌다. 그것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과 분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후 디자인과가 대세가 되고 디자인의 내연과 외포가 넓어져도 디자인에 대한 내 편견은 바뀌지 않았다. 디자인의 탄생에 기여한 러스킨과 모리스, 바우하우스 등을 알게 되었을 때도 디자인의 운동적 가치가 자본주의사회의 실용에 용해된 디자인의 위상을 바꿀 수 없었다.


 


 


얼마 전 대구의 한 대학 디자인 수업시간에 도시를 탐구해 발표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학생들이 대구라는 도시 안에서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될 소재를 찾아 디자인 작업을 하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두셋씩 팀을 이뤄 주제와 소재를 정하고, 사진작업과 인터뷰 등의 과정을 거쳐 디자인 작업을 완료하고, 작은 책으로 내거나 포트폴리오의 형식으로 발표했다. 문방구, 도시의 바닥, 대문, 맨홀뚜껑, 노점상, 집창촌, 구멍가게 등 도시의 다양한 면모들이 나타났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 관련 정보를 모으고 사진으로 찍어 정리하는 작업은 한눈에 봐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인터뷰를 하며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접하였으니 그 자체가 훌륭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 손님들의 말처럼 학생들이 주제를 택하고 다루는 방식이 다소 익숙했다. 그리고 본 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 공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내 기억에도 대학 3,4학년의 수준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다녔던 성미산학교의 중고등아이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와 발표 방식을 이들은 대학교에 와서 좀 더 세련되게 경험하는 것 같았다. 대학생들의 발표 후, 두 분의 예술가들이 각자 해오던 작업을 발표했다. 한 분은 건축설계도면 방식을 변형해 건물과 근대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합성해 현대를 비판하는 작업을 해오고, 한 분은 사회 현장에 직접 부딪히며 행동한 여러 작업과 사례를 발표하였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이미지와 행동의 대결 같았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각자의 예술관과 소신이 뚜렷했다.


 


학생들과 전문 예술인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고통과 문제의식, 생각의 디자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설사 세련되지 않더라도 커다란 문제의식과 고통을 가지고 작업을 했더라면 학생들의 작품이 분명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학생들의 작업엔 그런 점이 보이지 않았다. 문제의식이 강하지 못하다 보니 사유도 고민도 부족해보였다. 다만 표현에 치중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은 70, 80년대를 중심으로 한 근대 도시의 풍경을 낯설게 다시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그것들을 21세기 현대에 노스텔지어 상품으로 재소환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들의 발표가 익숙했다. 지금 서울의 골목들이 새로운 상권으로 각광받는 것도 그런 징후의 일부일 것이다. 곳곳에서 근대자본주의 역사를 통해서 완성된 상품과 삶의 풍경은 세련된 노스텔지어 상품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 도시는 두 가지 프레임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방금 말한 것처럼 근대도시에 대한 향수를 세련되게 재포장하는 작업과-이것은 박원순 시장의 마을공동체와 교묘하게 뒤섞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서울처럼 기존 도시를 밀고 새로 짓는 도시재개발이다. 하나는 과거를 다른 하나는 미래를 담보로 하고 있다. 경제적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둘은 상품의 유통가능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나는 고통에 대해 계속 생각이 머문다. 나는 작품의 진정성이 공감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공감이야말로 진정성의 내용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작품에는 삶의 고통과 진실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노점상, 구멍가게, 집창촌이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의 고통과 원인인 사회적 구조에 대한 통찰은 별로 나타나 있지 않았다. 커다란 문제의식 속에 커다란 해답이 주어지는 것이다. 기교보다 의도가 그립다. 이미지보다 사유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고통에 대한 공감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들의 발표를 들으며 내 머릿속엔 엉뚱하게도 소설 속 파우스트나 공자, 장자, 플라톤 같은 이들이 떠올랐다. 내겐 이들이 모두 나름의 훌륭한 디자이너들로 보였다. 공자와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기획을 보라. 파우스트와 장자의 꿈을 보라. 그들은 시대의 고통 속에서 나름의 사상을 낳은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디자인이란 현실이 되고 싶은 욕망이고 꿈일 것이다. 하지만 욕망과 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부재와 절망, 고통 아니겠는가? 고통에 대해 예민해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유하고 삶에서 풀어나가려 노력할 때 진정한 삶이 녹아든 디자인이 시작되지 않을까?


 


지금은 에코디자인도 있듯 디자인의 외연도 대단히 넓어졌다. 디자인을 단순히 상품을 포장하는 작업이라고 매도한다면 그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미지에 구속된 디자인이 불감과 사유정지로 귀결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물론 그런 디자인도 인정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질적인 디자인에 더 관심이 있다. 그것은 삶의 고통에서 비롯된 사유와 꿈을 꿈이며 그것의 추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결코 전문가의 독점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결국 삶과 사회를 디자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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