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몸으로 말하다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1호(2015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공자(孔子), 몸으로 말하다


 


김동민| 한양대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호주의 세계적인 팝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 (Olivia Newton-John)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노래 중에 1981년에 발표하여 빌보드 차트 10주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운 <Physical>이란 노래가 있다. 다소 선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 중에 ‘Let me hear your body talk’ 라는 가사는 반복되면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 더불어 ‘physical’과 ‘animal’이란 단어를 역시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경쾌한 리듬의 이 노래는 우리 몸의 본성과 자연에 충실하게 살면서 몸이 말하는 메시지를 듣고 싶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뉴툰이란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뉴튼 존의 외할아버지는 독일 태생의 저명한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이다. 보른은 전자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설명하였으며, 불확정성원리를 확립한 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행렬을 이용한 양자역학을 만들어 양자역학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인물이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보른은 영국으로 이주해 활동했으며, 그의 딸이 성악가인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와 결혼하여 뉴튼 존을 낳았다. <Physical>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뉴튼 존은 영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호주로 이주해 살았다.



보통은 ‘Body talk’보다는 ‘Body Language’란 용어를 흔히 사용한다. 둘 다 몸이 언어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얼굴의 다양한 표정과 손발의 동작, 몸짓 등이 그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나 몸짓 등을 통해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한다.” 라고 규정한다. 의사소통의 신호(Sign)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미디어이니,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몸은 언어라기보다는 미디어라고 해야 맞을는지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상징(Symbol)이라고 해도 된다. 언어도 상징이고, 비언어적 몸짓도 상징이다. 


 


 


몸짓을 통해 정서를 표현



몸은 이렇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상징이자 미디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기 전 오랜 기간 동안 몸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조음기관이 발달하기 전 목소리의 고저장단도 소통의 미디어였다. 원시시대에 목소리의 고저장단은 가장 효과적인 미디어였으며, 점차 분절음을 내게 되면서 조음기관을 탄생시켜 언어의 사용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나 몸짓 등을 통해 정서를 표현한다고 했다. 정서(情緖)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Emotion)이다. 기본적으로 정(情)이란 무언가 느낌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를 해체해보면 마음(心)에서 원초적인 붉은 기운(丹)이 생기는(生) 것, 그런 마음이다.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면 상징이 되고 미디어가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는 감정을 이성(Reason)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자제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진화론의 다윈은 달랐다. 감정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갖게 함으로써 생존확률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포를 느끼거나 다른 사람의 그런 표정을 보게 되면 조심하고 대비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분노, 혐오, 슬픔, 사랑 등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인류의 역사는 가능했을 것이다. <Physical>도 그런 감정의 표출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이롭다는 얘기다. 공자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절제된 중용(中庸)의 상태를 유지하라고 했지만, 그런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도 있으니 그럴 때는 절도에 맞게 하라고 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보면 분노해야 한다. 슬픈 일이 있으면 감추지 말 것이며, 인생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가슴으로 느끼는 마음이란 사욕(私慾)과 감정을 구별하여 바른 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할 때 ‘극기’란 소극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거나 극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체적으로 감당하면서 적극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사로운 욕심이 아닌 감정에 충실하면서 예(禮)에 복무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것을 몸으로써 절절하게 보여주었다.



<논어>의 ‘향당(鄕黨)’편은 공자가 몸으로 말하는 장면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공자의 말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로지 행동거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공인(公人)과 사인(私人)으로서의 처신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공자는 향당에서는 신실함이 지나쳐 위축되게 보였기에 마치 말을 잘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종묘와 조정에 있을 때는 말을 또박또박 잘하셨고, 오직 삼갈 따름이었다.(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가족들과 머무는 사적인 공간에서는 말을 극도로 아꼈지만 공적인 업무에서는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따졌다는 내용이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거드름을 피우고 위세를 부리면서 공적 영역에서는 윗사람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나랏돈을 축내는 공직자들이 우글대는 우리 현실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공자는 곡기를 주식으로 하고 고기는 적당히 먹었으며, 술은 두주불사지만 어울리기를 좋아할 뿐 주사를 부리거나 자세를 흩뜨릴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肉雖多 不使勝食氣. 唯酒無量 不及亂”



공자는 시장에서 산 술과 육포를 먹지 않았으며, 늘 생강을 먹었다고 한다. 술도 육포도 집에서 담그고 만든 것으로 먹었지, 청결하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는 술과 육포를 사먹지 않았고, 해독과 악취 제거에 좋은 생강을 즐겨 먹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에서 정갈하게 빚은 술에 맛깔나게 만든 요리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강이 몸에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건강이 최고다. 공자는 건강을 위해 소식을 했다(不多食)는 얘기도 있다. 또한 성찬이 있으면 반드시 표정을 가다듬고 성찬을 마련해준 사람에게 절을 하였다는 것이다. 성찬이 좋아서가 아니라 마련해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당연히 대접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얻어먹으면서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측은지심이 없는 자는 사람새끼가 아니다



공자의 마굿간에서 불이 났는데, 조정에서 퇴근하고 돌아와 이를 듣고는 다친 사람이 있는지 묻고 말(馬)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런 장면도 있다.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바람이 맹렬하게 불면 반드시 몸가짐을 바꾸셨다.(迅雷風烈必變)” 천재지변이 예견되면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일 것이다. 이게 당연한 것 같지만 누구나 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유가족들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슬픔을 같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을 욕되게 하고 비난하며 협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심지어 광화문 농성장을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공언하며 나서는 조직도 있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는 자는 사람새끼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런 자들은 사람새끼가 아닐 터이다.



공자는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행동에 옮김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이런 행동은 이성의 판단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머리로 배웠다고 다 배운 대로 실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밭에 감정이 생겨 몸에 배이게 될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다. 공자는 나이 70이 되어서는 감정의 욕구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 삶이 지향하는 바다.


 


 




 

The author didnt add any Information to his profile yet

  • Published: 403 posts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