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닉 섹스의 기원(2) – 모계제는 부계제와 어떻게 다른가?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0호(2015년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플라토닉 섹스의 기원(2)


  – 모계제는 부계제와 어떻게 다른가?


 


도연명| 출판인


 


중국 서남부의 산악 지대에는 5만 명이 넘는 모수오족이 살고 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도 등장하는 이 모수오족에겐 결혼이란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계절과 같이 오가는 것이라 남녀를 억지로 묶어 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모수오족은 모든 성인 남녀에게 성적 자율성을 보장해 준다. 이들에게는 다툼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강간이나 전쟁, 살인을 뜻하는 단어 자체가 없다. 이들의 언어에는 남편이나 아내를 뜻하는 단어도 없고, 친구를 의미하는 ‘아주’라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모수오족은 재산과 성이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상속되는 모계사회다. 따라서 가정은 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두가 모두의 아버지인 사회



소녀가 성장해 13세 정도가 되면 자신의 침실을 받는데, 침실은 은밀한 문을 통해 거리로 열려 있다. 모수오족 소녀는 밤에 이 문을 통해 남자를 들인다. 어떤 남자를 선택할지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으며, 그야말로 완벽한 자율권이 부여된다. 임신해서 아이가 생기면 산모의 어머니 집에서 남자 형제들과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양육한다.



모수오족 남자는 여자 형제의 자녀를 자신이 책임지고 돌볼 존재로 여긴다. 아저씨가 사실상 아버지가 되는 셈인데, 실제로 모수오족의 ‘아우’라는 단어는 아버지와 아저씨의 두 가지 뜻을 갖는다. 바꿔 말해 이들에겐 아버지와 아저씨의 구분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수오족 어린이들에겐 자신을 돌봐주는 수많은 아버지들이 존재하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씨앗을 뿌리는 일에만 혈안이 된 다윈주의 속 남성과 전혀 다른 인간형을 맞닥뜨리게 된다.



다윈주의에 입각한 기본 가정을 무너뜨리는 이런 시스템은 비단 모수오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경 이전의 생활양식을 보존해 온 대부분 사회에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다윈주의에서 말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농경 이전과 이후의 사회 중에 과연 어느 쪽이 인류의 보편적인 본성을 반영하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최초의 인류에 속하는 호모 에렉투스는 약 200만년 전에 모습을 드러냈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은 대략 20만년 정도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작된 지 고작 1만년밖에 되지 않는 농경은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통틀어, 지극히 최근에 생겨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의 본질을 진화의 관점에서 논하려 했다면 마땅히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인 수렵채집인들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해야 했다.



수렵채집인들에겐 사유재산이란 것이 없다. 모든 것을 공유하며, 식량을 비축하거나 감추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만일 가뭄이 들어 모두가 굶주리는 시기에 쌀가마로 매점매석하는 사람에게 분노가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진화론적 본성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만일 일부일처제에 대해 버겁고 부조리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 또한 진화론적 본성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공유의 전통’은 당연히 섹스에도 적용됐으며, 일부일처제는 극히 최근에 농경과 함께 시작된 이례적 관습이기 때문이다.


 


 


섹스를 공유한다는 것의 의미



섹스의 공유는 인류의 오랜 세월에 걸친 매우 자연스러운 습성이었다. 인류학, 해부학, 심리학, 동물학의 많은 연구들이 동일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과학적 증거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의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죄의식 없는 공개적 성생활과 배우자의 공유 등에 관해 수많은 증언을 남겼다.



모계제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성적 자유를 속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돼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아버지 없이 자란 ‘후레자식’들로 득실대는 혼돈의 세계가 연상되지만, 실상은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아이에게는 부족의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17세기에 활동한 선교사 폴 르 죈느(Paul Le Jeune)가 몽타니에 인디언 남자에게 그들 사회에 만연한 성적 부도덕의 위험성에 관해 설교한 일이 있었다. “여자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합니다. 이런 죄악이 당신들에게 있는데, 어떤 사람의 아들이 정말 친자식인지를 어떻게 확신하겠습니까?”란 지적에 그 인디언은 “당신은 뭘 모릅니다. 당신네 프랑스인들은 오직 자기 자식들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의 모든 자녀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모계제 사회의 남자들은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기 자식에게만 애정을 쏟고 남의 자식은 아랑곳 않는(때로는 자기 자식의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아이들에게 돌아갈 식량을 빼앗는 뻔뻔스러운 행위마저 서슴지 않는) 왜소한 존재들이 아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의심의 눈초리로 아내의 정조를 의심하기는커녕 아버지의 역할을 기꺼이 공유한다.



적어도 복지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현대 사회는 이러한 시스템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부모를 잃고 안전을 위협받는 아이가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의 형제와 자식이 되는 사회, 모두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 성관계는 단순한 생식과 쾌락을 넘어 집단의 결속력 강화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농경은 도대체 왜 시작된 것일까



잠깐 얘기가 옆길로 새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인류가 농경을 시작해서 반대급부로 얻은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농경을 시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것이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선사시대인들의 유골과 치아를 연구한 결과들에 따르면, 농경과 함께 굶주림이 오히려 급격히 증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장기의 아동이 일주일 이상 영양 섭취를 못하면 뼈의 발육이 느려진다. 영양이 회복되고 뼈가 다시 자라면 새로운 뼈의 성장 밀도가 달라 선으로 남는데 이것을 해리스선이라 부른다. 장기적인 영양실조 기간엔 치아에도 변색된 띠와 작은 구멍 같은 흔적들이 남는다. 이런 흔적들은 화석화된 유골에서도 관찰이 가능하다. 고고학자들은 수렵채집인들보다 농경민들의 유골에서 훨씬 많은 해리스선과 치아 발육부전을 발견했다.



이러한 점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리스와 터키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살펴보면 농경사회 이전에 그 지역에 살던 남성들의 평균 키가 180센티미터, 여성들은 168센티미터였다. 그러나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평균 신장은 급격히 줄어든다. 현대의 그리스인과 터키인들조차 그들의 고대 조상들만큼 크지 않다. 유럽의 성(城)과 박물관에 전시된 갑옷들을 보면 대부분 체구가 아주 작은 사람이 아니면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중세 유럽인들이 그만큼 작았다는 얘기다.



남아메리카의 수렵채집 부족인 아체족의 식단은 광범위한 식물들뿐 아니라 78종의 상이한 포유류, 21종의 파충류와 양서류, 150종이 넘는 새를 포함하고 있었다. 수렵채집인들의 다양하고 영양이 풍부한 식단은 농경이 시작되면서 지극히 단조로운 곡물 위주의 식단으로 변했다.



오늘날의 유타주 지역에 거주했던 인디언들의 메뉴인 모르몬 귀뚜라미의 에너지 효율성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자. 실험에 동원된 집단은 한 시간에 약 18파운드의 귀뚜라미를 모았다(원주민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을 잡았을 것이다). 단 한 시간의 노동으로 87개의 칠리 도그, 또는 49조각의 피자, 43개의 햄버거에 해당되는 칼로리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칼라하리 사막의 꿍산족은 매일 평균 2,140칼로리와 93그램의 단백질을 섭취했다. 고고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석기시대인들이 농경민들 대부분보다 훨씬 건강한 삶을 영위했다고 말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수렵채집인들은 식량을 구하는 일에 쓰는 시간이 너무 적어,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오후에 3시간 정도 한가로이 낮잠을 잔다.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들도 식량을 구하는 데 일주일에 약 15시간만 쓴다고 한다. 나머지는 여가 시간이며 1년 내내 이러한 생활 패턴이 유지된다.



스트레스나 만성피로와 무관한 삶을 사니 심신이 건강하지 않을 수 없다. 고고학자들이 에콰도르의 고립된 지역에 사는 와오라니 인디언들을 연구했을 때, 고혈압이나 심장병, 암을 발견할 수 없었다. 빈혈이나 감기조차 없었고, 기생충도 없었다. 소아마비나 폐렴, 천연두, 수두,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매독, 폐결핵, 말라리아, 간염 등에 걸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류의 건강이 농경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성적 영양 결핍과 더불어 치명적인 질병들이 시작됐다. 쓰레기로 가득 찬 인구밀집 지역들, 사람과 붙어 사는 가축들, 병원균의 이동을 촉진하는 교역로 등이 전염병 창궐의 원인이었다. 인류학자 로버트 에저튼(Robert Edgerton)은 유럽의 도시인들이 20세기까지도 수렵채집인들의 수명에 근접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도 “농업으로의 변천은 우리가 결코 회복하지 못한 재앙이다”란 말을 했다.



결국 농업이 시작되면서 노동량이 급격히 증가한 반면, 식량은 오히려 부족해졌고, 삶의 질 자체가 많이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인류는 농경과 함께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농경을 시작했던 것일까? 이것은 가히 ‘농경의 미스터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문제가 내포하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논점은 나중에 다뤄 보도록 하겠다.


 


 


모계제는 부계제의 반대말이 아니다



인류가 원래 여성 중심의 모계제 사회를 이뤘다는 말에 “그럼 우리한텐 불리했던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남자들이 꼭 있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학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적잖은 사람들이 ‘진정한 모계제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 모계제를 부계제의 반대 형태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찍어 누른 것처럼, 여성이 권력을 잡고 남성을 찍어 누르는 사회를 모계제로 여기고 그에 들어맞는 모델을 찾았던 것이다(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의 남녀 차이를 도외시한 결과이다.



인도네시아의 미낭카바우족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모계제 사회를 이루고 있지만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형태가 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합의에 의해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대편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류학자가 미낭카바우족에게 여성과 남성 중 어느 쪽이 지배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란 대답을 들은 것은 당연하다.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다. 남녀는 서로를 보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 지배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대접을 못 받지만,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성은 충분한 존중과 우대를 받는다.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훨씬 편안한 삶을 누린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문화에 익숙해진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사회 시스템을 또 다른 형태의 가부장제로 해석하고 만다. 여성이 지배를 한다면 남성들이 억압 속에서 굴종을 해야 할 텐데, 그런 현상이 발견되기는커녕 모든 남성들이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으니 온건한 형태의 가부장제 정도로 간주되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비극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이 남성들에게 행복을 주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실제로는 남성들도 여성들 못지않게 비참하다. 21세기의 한국에도 장가를 못가는 젊은 남성들이 부지기수이긴 하지만, 이것은 농경이 시작된 이래 늘 지속된 문제였다. 다시 말해 공유가 됐던 섹스가 사유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쏠림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녀 관계조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지배를 받는다. 즉,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남성들이 수많은 여자들과의 관계를 독점하게 된다.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창녀가 아닌 이상 성관계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생계와 안전을 보장해 주는 한두 명의 남성에게만 몸을 허락하므로 늘 일정 수의 남성들은 성관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배우자의 관심을 잃은 여성 또한 성관계에서 배제되긴 마찬가지지만, 여성의 지위가 워낙 낮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별다른 문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러한 맥락에서 찾는 것이 합당할지를 생각해 보자. 사회구조상 성관계에서 소외되는 남성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빈부격차가 심해짐에 따라 이런 남성들이 폭증하면 사회 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은 원래부터 성욕이 유별나게 강한 종이라서 섹스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그렇지만,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가 되는 면이 있다. 섹스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도연명 님은…
도연명은 필명이다. 현재 출판사에서 일하며, 그동안 주로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관해 탐구하고 그 방면의 책을 기획, 출간하였다. 앞으로 개벽신문에서 근대 사회가 가지는 모순과 문제점을 독특하면서도 날카로운 분석으로 파헤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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