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삶(2)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 글은 개벽신문 40호(2015년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행복과 삶

심규한| 시골살이 여행학교 길잡이

간혹 자기는 삶의 목적이 없다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며 ‘너는 왜 사냐? 네 삶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한다. 난감하다. 사실 나는 해 줄 말이 많지 않다. 내 삶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연의 모든 생명은 환경에 적응해서 지속하고 번성하고자 한다. 사람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정직한 일차적 답변일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삶으로 바라보는 자연의 입장과 달리, 사회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한다. 우리는 고립적 개인이기보다 사회적 개인인 것 같다. 의미 있는 삶은 사회 속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평등을 위해 산다.’ 같은 삶의 목적론을 듣게 된다.
앞(지난 호)의 행복론에서 우리는 타자로 인해 의미를 획득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을 중심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 또 ‘행복한 삶’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한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삶의 유형을 그 목적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것은 철학, 가치, 기호이다.

기호 추구는 개인적이고 쾌락적이다
기호(嗜好)는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다. 흔히 우리가 자아를 실현한다고 할 때 그것은 기호의 인간을 의미한다. 잘 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기호인을 이상형으로 생각한다. 경제인은 개인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기호를 추구한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기호에 맞는, 기호를 선도하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는 기호적 소비가 중심을 이루고, 기호를 선취하기 위한 상업광고가 발달한다.
기호의 범위는 무한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감각의 쾌락을 추구하고, 그것이 생존에 기여하는 한 긍정적이다. 술이나 담배, 커피의 진짜 기호식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주, 각종 상품, 관광, 성, 라이프스타일 등이 모두 기호의 대상이다. 한마디로 기호는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기호의 천국이다. 하지만 기호추구를 도덕적이거나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의미도 개인에게만 의미 있을 뿐이다.

가치 추구는 사회적이며 희생적이다
반면 가치(價値)는 기호를 능가한다. 그것은 사회적이다. 도덕과 정치, 그리고 종교는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종교 중에는 개인의 구원에만 매몰되는 기호적 종교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등종교는 사랑과 평등 등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 간디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이들은 기호를 절제하고 가치를 위해 삶을 투신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삶이 그토록 검소한 이유는 기호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훌륭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이다. 사랑, 희생 같이 타인을 향한 노력은 언제나 우리의 사회지향적 욕구를 자극하여 감동시킨다.
가치가 도외시된 채 기호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다. 도덕과 정치가 경제를 어느 정도 통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행복을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경제에, 가치는 기호에 적절히 관여해야 한다. 지나친 개인의 행복추구가 사회적 행복을 파괴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숭고함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기회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해를 통해 지혜에 도달하고자 한다
나는 아마도 철학의 부류에 속할 것이다. 슬픈 마리, 새옹지마, 불교,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모두 불가지한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방법이었다. 철학은 이해를 통해 지혜에 도달하고자 한다. 지혜는 깨달음이고, 깨달음을 통해 존재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다소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철학을 위해서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편 철학자는 가치를 지향하지만 어느 정도 기호의 필요도 인정한다. 소위 중도 내지 현실주의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과 영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하는 합리주의 내지 현실적 이상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처럼 철학은 타자의 복권 내지 요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대가 직면한 위기, 곧 개인이 가진 기호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타자와 공동체를 도외시한 개인이야말로 고독과 무의미와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정치와 종교, 도덕 등 가치의 영역을 통해 타자와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 삶의 목적이 될 만하다고 제시하게 된다.

기호의 사람은 몸의 사람이고, 가치의 사람은 마음(영혼)의 사람이고, 철학의 사람은 정신의 사람이다. 세 부류의 순수한 이상형을 현실에서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철학과 가치와 기호를 지니고 또 추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과연 어떤 것을 중요시하고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방향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호에서 철학으로, 그리고 철학에서 가치로 향하는 관심의 방향 말이다. 이것이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보자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좋은 삶’이 아닐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삶은 좋은 삶을 지향함으로써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슬픈 마리가 철학과 가치의 목적을 가지게 된다면 슬픈 마리는 더 이상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을지 모른다.
행복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행복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행복과 불행을 통찰하고, 행복과 불행을 초월한 의미 있는 삶, 좋은 삶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삶은 삶이지 않겠는가? 힘껏 살아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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