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위기는 ‘거대한 전환’의 메시지이다

3 years ago by in 개벽과 뉴스

* 이글은 개벽신문 39호(2015년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사진 : 박길수)

 

류정길 |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환경문제는 환경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기술 발달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생산력도 고도화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높아졌고 공업의 발달로 인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업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서서히 해체되어 갔으며,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끼리의 협력은 느슨해지고 개인들에게 더 많은 자유가 부여되었다.

자연에 대한 신비감과 공포심으로부터 해방되어 거침없이 세계를 정복하고 자연을 지배해 나갔지만, 그 과보를 받게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업사회가 시작된 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 인간의 자연 개조 능력은 가공할 정도가 되었고, 생산 능력과 소비 능력은 그것을 분해하고 재생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서 이제야 그동안 누리던 우리의 가치관과 그에 기반한 생활양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의 환경문제를 통해 인류는 최초로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서 위기를 맞게 되는 초유의 사건을 목전에 두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동안 ‘당연한 것’, ‘본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이 잘못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은, 자연은 무한한 것이라는 대전제 위에 모든 나라들은 생산력 경쟁을 해 오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생산력의 고도화’가 발전이며 진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순식간에 역사·문화·예술 등의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경제적 가치’를 유일한 척도로 하여 모든 국가를 서열화하기 시작했고, 그에 의거하여 정치적·물리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노동과 자본이라는 모순을 잉태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회주의 사상과 이에 기초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태동하여 7-80년간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사회주의 역시 결국 생산력주의를 진보로 생각하여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사회를 지고지순의 가치로 삼은 결과, 결국 인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본주의와 쌍둥이였다는 것을, 환경위기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영국의 녹색당을 만든 조나단 포리트(Jonathan Poritt)는 이 같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역사를 ‘그놈이 그놈인 싸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1991년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의 공식 의제였고, 브룬트란트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 처음 제출된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Environmentally Sound & 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은, 인간에게 이제까지와 같은 발전 개념이야말로 ‘전복’되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이 개념은 ‘미래인류의 가능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재의 발전’을 뜻한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생태주의나 녹색사상은 다음 몇 가지의 거대한 전환을 강제하는 정치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발전, 성장의 토대인 자원무한주의로부터의 전환    

 

첫 번째는 자연무한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모든 경제 행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무한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전 인류는 기술발달과 생산력이 높아지면 어느 시간에 이르러 모두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이나 동남아,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은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Lifestyle)을 궁극의 목표로 두었고, 우리나라 역시 GNP 12위니, 13위니 하는 서열 경쟁에 동참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맑은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을 때 ‘자연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뿐인 지구’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출발한 말이다.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온실가스 문제나 폐기물 문제 등의 위기는 이렇게 잘못된 ‘자원무한주의’의 전제 위에 구축된 그릇된 가치관에서 양태된 것이다. 가용자원이 ‘한계’가 있다는 유한성은 곧 ‘자연자원 매장량의 유한성’, ‘외적 교란에 대한 생태적 수용능력의 한계성’, 그리고 ‘생태적 파괴에 대한 비가역성’을 말한다. 이제야 인간은 생태계의 물리적 조건은 무한 성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자연이 유한하다.’란 인식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강제하는가? 우선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전제로 한 사회로부터의 전환을 강제하고 있다. 나아가 그동안 경제중심의 발전 개념에서 벗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으며, 진보에 대한 인식이나 직선적인 사회발전 개념에서도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바로 이러한 급박한 시점에서 인류는 다시금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주의 인식의 전환    

 

두 번째는 민주주의 인식의 전환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현재’ 살고 있는 ‘인간’만이 참여하는 공시적(共時的) 결정체계이다. 그러나 미래세대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단순히 레토릭이 아닌 실제 현실성을 갖는 문제라면, 지금 존재하지도 않은 미래세대의 의사를 반영해야하는 통시적(通時的) 결정체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세대에게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이라는 용어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지를 반영하는 민주주의 결정구조를 과연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는 오늘날 큰 과제로 제기되는 쟁점이다.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세계관은 인간을 제외한 생명계와 자연일반을 고려하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민주주의는 인간 이외의 생명들이 서로 상호 의존하면서 존재할 수 있는 생명권과 미래세대의 의사와 미래세대의 생명들까지를 고려한 통시적(通時的)이면서 통생명적(通生命的)인 민주주의로 나아가길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러한 대안적인 시스템은 인류가 개발해내지 못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궁극의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조안나 메이시(Joanna Meicy)같은 불교생태 여성학자는 우리의 참여 민주주의의 일부분에 미래세대와 생명을 대변하는 대변자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와 발전, 행복의 가치 전환    

 

세 번째는 ‘발전’과 ‘진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강제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재해석한 영국의 H. 스펜서는 자연계가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이듯이 인간사회의 윤리도 궁극적으로 그러한 경쟁과 투쟁의 가치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에 제국주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했고, 오늘날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정글의 법칙을 기정사실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세계는 이와 반대라고 생태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사회진화론’을 반박한 최초의 사람은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즘 사상가인 크로포트킨(Kropotkin, 1842 ~1921)이었다. 그는 자연의 수많은 생물들을 탐구하면서, 개체와 개체간은 대립과 경쟁의 측면이 있지만 생태계 전체는 ‘상호의존’과 ‘상호보완’하며 만들어내는 ‘다양성’의 측면이 더욱 규정적이라고 그의 저서 『상조부조론』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까지 잘못된 자연관에 의해 인간의 역사는 경쟁과 대립을 일삼다가 궁극에는 전쟁으로 치달아 온 역사였고, 또한 이것은 결국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뉴턴,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본래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고 쪼개어 개인과 개인을 분절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즉 인간관계마저 ‘너의 고통은 나와 상관없다.’는 인식의 토대가 된 근대적 세계관을 낳은 것이다.

자연무한주의는 경쟁적으로 자연을 개조하고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게 한다. 또한 경제중심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오로지 재화의 양적 가치로 서열화하여, 모두가 정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이전 투구하는 전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생명운동은 평화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생명평화’라는 말을 함께 사용해왔다. 

 

이러한 이익과 이윤논리로 결정되는 구도 속에서 예술, 법학, 정치, 의학, 문학 등 전 학문도 포섭되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교육은 인격 연마의 장이 아니며,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계층 상승을 위한 고급 직업 훈련소가 되어 무한경쟁 속에 서로 살아남기 위해 스펙 넓히는 일에 주력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진정한 학문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남보다 더 우수한 상품가치로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조기유학, 선행학습, 과외 등 교육계를 어지럽히는 모든 문제들은 이러한 이원론적이고 경쟁적 사회관계속에서는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과들이다.

또한 온갖 착색제, 발색제, 농약, 제초제를 친 농산물을 시장에 내놓고 돈벌이만 된다면 먹는 사람의 생명이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사고팔 수 있고, 눈 하나 깜짝 않고 부정과 비리를 일삼는 돈 중심의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쟁과 경제적 양적가치를 중심으로 서열화된 사회에서는 설령 한 게임에 승리했다고 해도 더 많은 다른 게임에서도 계속 승리자가 되기 어렵다. 경쟁사회 속에서 비록 인간은 작은 성취를 얻었다고 해도 결국 더 많은 패배와 좌절의 경험으로 내상을 입고 황폐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자연은 그저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한 대상일 뿐, ‘보존’해야 한다든가 ‘고유의 가치’를 인정할 겨를이 없다. 이처럼 위기의 총체는 하나의 근본에서 비롯되어 서로 얽히고 연결되어 드러난 서로 다른 얼굴들인 것이다. 

 

가부장적인 남성성의 사회에서 관계지향적인 여성성의 사회로의 전환    

 

또한 돈과 욕망을 따라 이동하는 ‘떠돌이 주거 문화’에서는 더 이상 이웃 간의 공동체는 없으며, 주변의 자연을 지키고 책임지는 인식이 생길 수 없다. 결국 ‘이웃 간의 공동체적 화합과, 주변 자연에 대한 책임의식’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붙박이 정주문화’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노동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여 최대한 적게 일하면 좋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노동은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노동해방’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목표지향적이고, 확대지향적, 가부장적 남성성의 사회에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과정지향적이며, 관계지향적인 여성성의 사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원자력발전소라는 거대한 플랜트의 유지는 강력한 중앙중심적 국가의 통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계수명 30여년 밖에 안 되는 현세대만의 전력소비를 위해 이후 수 만년 동안 후세들에게 방사능 피해와 폐기에 대한 위험을 떠넘기는 것이다. 하루 빨리 단계적으로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될 에너지라는 것을 1986년 체르노빌사건과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인류는 심각하게 깨닫게 되었다. 현세대가 발생시킨 문제는 현세대가 온전히 처리하고 그 과보를 받아야 하며, 절대 미래세대에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생태적 윤리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볼 때 핵발전소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에너지가 아니고 태양력, 풍력, 지열, 파력, 조력 등의 대안에너지로 사회적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너지는 결국 지역 분권화된 구조에서 더욱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깨우치고 있다. 

 

세계인구의 5%에 불과한 미국이 세계석유의 23%를 소비하는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Life Style)을 모든 인류가 지고지순의 목표로 삼는 한, 인류의 절멸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한 발전 패러다임을 가난한 나라에 이식하려는 구호와 개발지원은 결과적으로, 지역마다 고유하게 전통적으로 내려온 공동체를 파괴하고 원주민들을 야수적인 시장경제에 편입시켜 경제식민지로 만들고 인류의 위기를 가속화시킬 뿐이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자립적인 마을개발과 공동체를 토대로 ‘가난도 부정하지만, 풍요도 부정하는’ 가치로 개발지원과 구호활동이 전환되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환경문제는 잘못된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가장 약한 고리인 ‘환경위기’라는 증상으로 드러난 것인 만큼, 환경 그 자체의 치유 뿐 아니라 원인적 접근을 통해 근본 치유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로 인식해야 한다. 

 

나누고 끊어놓은 세계를 다시 잇고 결합하는 전환    

 

그동안 산업사회 과정에서 많은 문학과 예술이 인간소외와 비인간화의 문제를 표현했지만, 현재 누리는 경제적 풍요를 부정하고 전복까지 요구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전 지구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를 앞두고는 근본의 문제를 더 이상 유보할 수없는 긴박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부분적 개선의 개량적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드러나는 위기 문제에 대한 대책에 우리 모두 발 벗고 나서야 된다는 것이다. 

 

현재 개별 국가 단위 내에서는 아직도 ‘경제’성장을 우선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환경과 생태문제, 자원과 관련된 국가 간의 움직임은 더욱 첨예해질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피크오일(Peak Oil)등으로 인해 국제간의 정치·외교적 갈등은 높아가고 심지어는 전쟁의 위험까지 우려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자원문제로 비롯된 이 환경문제는 결국 평화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적 가치 속에서 단순히 전쟁만 반대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지배와 정복, 경쟁의 가치관을 토대로 하고 있는 현재의 문명 자체가 환경위기를 불러오기도 했지만, 결국 분쟁과 전쟁 등, 반 평화를 초래한 바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전환’이다.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문명 차원의 전환을 강제받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일체의 사상까지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을 우리말로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개벽’이다. 그래서 ‘다시 개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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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님은… 

1986년 수행공동체 정토회 창립 초기부터 함께 불교수행과 사회운동을 해왔고, 산하 에코붓다의 대표로 ‘생태사상과 교육운동’과 ‘음식물쓰레기 제로-빈그릇운동’등 대안적 환경운동을 전개했다. 현재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 한살림연수원 운영위원,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조계종환경위원, 녹색연합산하 녹색교육센터 이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계간 <민주>,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이다. 저서는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공저로 『소비자는 어떻게 유기농을 망치는가』, 『녹색당과 녹색정치』, 『불교의 생태적 지혜와 환경』, 『세계어디에도 내집이 있다』 외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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