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경전에서 찾아본 ‘전환’의 의미

박길수 | 본지 주간

 

동학의 전환 = 개벽

최근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전망하고 기획하는 화두가 ‘전환’이라는 말로 집약되고 있다. 전환에 관한 담론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예컨대 이제 미래가 아닌 현실이 된 ‘사물인터넷(Iot=Internet of Things)’은 가정 내의 가전제품은 물론 개인이 의식주 생활, 사회생활과 일거수일투족에서 접하는 사물들이 모두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정보를 축적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구현하는 꿈과 같은 세상이 곧 다가올 것으로 전망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신세계를 열어주기라는 기대와 아울러 인류를 멸망시킬 제1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그동안은 이상기후나 혜성충돌 같은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환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이 나와 우리에게 끼칠 영향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대전환’이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며, 곧 가시적인 결과들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의 ‘전환’은 이미 150여 년 전 동학에서도 예견되었다. 동학에서 전환을 적시하는 단어는 단연 ‘개벽’이다. 수운 선생의 동학 창도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은 바로 이것이다.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開闢 아닐런가(「안심가」, 「몽중노소문답가」).” 훗날 의암 손병희 선생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지의 기수로 보면 지금은 일 년의 가을이요, 하루의 저녁때와 같은 세계라. 물질의 복잡한 것과 공기의 부패한 것이 그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사이에 있는 우리 사람인들 어찌 홀로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 큰 시기가 한번 바뀔 때가 눈앞에 닥쳤도다(「人與物開闢說」).”

십이제국은 ‘온 세상’이라고 보면 된다. 괴질운수란 인간의 지식으로 따라 잡을 수 없는 질병과 재난과 ‘붕괴’의 상황을 말한다. 한때의 암이나 에이즈처럼 ‘불치의 질병’은 물론이고, 아직 그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질병이 존재한다. 최근의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처럼 결국 치료법을 찾게 되더라도, 그 사이에 수많은 목숨들을 잃게 되는 것이 괴질이다. 이를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말하자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과 약탈적 행위들은 물론이고, 그리고 ‘합법적’이고 따라서 정당하며, 심지어 인간 사회의 성장발전의 원동력으로 찬양되기까지 하는 경쟁적 ‘경제활동’도 실은 인간이 자초하거나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괴질’이라 할 수있다. 인간(생명)의 존엄을 갉아 먹는 인조괴질인 셈이다.

 

개벽은 혁명이 아닌 순환지리

이때 개벽은 과거의 것을 전적으로 파괴하고 처음부터 새것을 만들어가는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것을 치유하는 것이며,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것이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다. “이 세상 운수는 천지가 개벽하던 처음의 큰 운수를 회복한 것이니 세계만물이 다시 포태(胞胎)의 수를 정치 않은 것이 없느니라. 경(經=‘嘆道儒心急’; 필자주)에 말씀하시기를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 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개벽의 운이요 개벽의 이치이기 때문이니라. 새 한울․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개벽운수」).”

이런 의미에서 개벽은 ‘순환(循環)’이라는 의미가 짙다. “성한 것이 오래면 쇠하고 쇠한 것이 오래면 성하고, 밝은 것이 오래면 어둡고 어두운 것이 오래면 밝나니 성쇠명암은 천도의 운이요, 흥한 뒤에는 망하고 망한 뒤에는 흥하고, 길한 뒤에는 흉하고 흉한 뒤에는 길하나니 흥망길흉은 인도의 운이니라(「개벽운수」).”

순환은 사실 생명의 본성이기도 하다. 들숨과 날숨이 그러하며 “(생로병사-)생로병사(-생로병사)”의 무한 연쇄가 그러하듯, 한 지점에서 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단선적’인 세계는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일 뿐, 존재란 무릇 순환함으로써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순환은 불교적 ‘연기(緣起)’와도 맞닿아 있으며, 진리의 진상(眞相)을 표현하는 말이다.

“부(富)하고 귀(貴)한 사람 이전 시절 빈천이오, 빈(貧)하고 천(賤)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사 무왕불복(無往不復) 하시나니…(교훈가).” 여기서 수운은 현재의 부귀자의 몰락을 말하는 대신 현재의 빈천자가 부귀하게 될 것만을 말한다. 이는 동학의 개벽이 ‘혁명’을 넘어, ‘분노’를 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무왕불복’의 이치란 순환의 다른 말이면서 동학의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일찍이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소식을 들은 원처근처의 지식인(선비)들이 몰려들어 수운에게 ‘한울님이 강림하시어 새로운 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수운은 “무왕불복지리-가고 다시 돌아오니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았다(「論學文」)고 대답하였다. 선비들이 다시 그 이름을 묻자 수운 선생은 “천도(天道)”라고 대답하였다.

훗날 해월 최시형 선생도 “천운이 순환하여 오만년의 대도가 창명된지라. 세상 악마의 항복은 삼칠자의 신령한 주문을 믿는 데 있으려니와, 때를 따라 숨고 운을 응하여 나타나는 것은 이것이 대도의 활용이니라(「기타」).”고 하여, 동학은 천운의 순환을 타고 난 가르침임을 재확인했다.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의 전환

어떠한 조건에서 순환은 일어나는가. 대기의 순환을 일으키는 것은 온도의 차이라면, 시운이 순환하게 하는 동력은 운수의 ‘지극’함이다. “시운을 의논해도 일성일쇠(一盛一衰) 아닐런가. 쇠운이 지극(至極)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동양의 오랜 지혜이니 따로 주목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서 ‘동귀일체’가 주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쇠운의 지극함을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동귀일체로부터 멀어짐, 바로 각자위심(各自爲心)이다.

동귀일체의 의미를 알자면 각자위심을 알아야 하고, 각자위심의 의미를 알자면 동귀일체를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다가 죽어 가는) 많은 사람 한울님을 우러러서 조화중에 생겼으니, 은덕은 고사하고 근본조차 잊을소냐. 가련한 세상사람 각자위심(各自爲心)하단 말가. 경천순천(敬天順天) 하여스라. 효박한 이 세상에 불망기본(不忘其本) 하여스라(「권학가」).”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각자위심은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근본’이란 바로 생명의 본성이요 다른 말로는 ‘한울님’이다.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하기에 앞서서 이 세상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바로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는 말이다. 각자위심이란 좁게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만을 좇으며 사는 것’이라는 ‘이기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기심이 이룩해 놓은 세계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살인적인 경쟁과 빈익빈 부익부, 적자생존의 치열한 신자유주의 체제 세계이다. 그러나 각자위심의 본질적인 의의는 그러한 삶의 행태가 비롯되는 사람들의 허위의식(虛僞意識)서의 각자위심이다. 나와 남, 사람과 자연(환경), 생명과 사물이 서로 떨어져 있다(各自爲)고 생각(心)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실상(實相)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생각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치부된다.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사는 것은 서로 도우면서 사는 것보다 앞서는 미덕이 되어 왔다. 그러한 삶의 행태가 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사회이다. 모두들 그것이 편하며 선(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이며, 그만큼 생명을 단축시키고 위축시키는 삶의 형식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갈라놓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언제나 권력자요 기득권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실상은 동귀일체(同歸一體)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로부터 나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 – 다 – 일의 순환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며, 존재 그 자체의 실상이다. 사람이 공기 없이 살 수 없듯이, 나는 ‘너’ 없이는 생존은커녕 ‘존재’조차 할 수 없다. ‘너’라는 타자를 전제로 해서만 ‘나’라는 주체가 인식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상과 어긋나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되는가? ‘병’이 생긴다. 오늘날 인간이 맞닥뜨리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 불행과 고통, 갈등과 악다구니가 바로 그 ‘병’이다. 이것들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개선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오직 동귀일체의 자각, 동귀일체의 실천, 동귀일체 세상의 실현(實現)만이 치유책이다. 동학은 바로 그 동귀일체를 위한, 동귀일체에 의한, 동귀일체의 철학이요, 종교이다.

 

예언인가 필연인가, 명령인가 바람인가?

지금부터 1백여 년 전에 해월 선생은 이 세상이 전환(개벽)의 시기에 임하여 있음을 말하였다. 그 징조는 다음 몇 가지로 나타난다. (1) 천지도 편안치 못하고, 산천초목도 편안치 못하고, 강물의 고기도 편안치 못하고, 나는 새․기는 짐승도 다 편안치 못하리니, 유독 사람만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으며 편안하게 도를 구하겠는가. (2) 선천과 후천의 운이 서로 엇갈리어 이치와 기운이 서로 싸우는지라, 만물이 다 싸우니 어찌 사람의 싸움이 없겠는가. (3) 천지일월은 예와 이제의 변함이 없으나 운수는 크게 변하나니, 새것과 낡은 것이 같지 아니 한지라 새것과 낡은 것이 서로 갈아드는 때에, 낡은 정치는 이미 물러가고 새 정치는 아직 펴지 못하여 이치와 기운이 고르지 못할 즈음에 천하가 혼란하리라. (4) 이때를 당하여 윤리․도덕이 자연히 무너지고 사람은 다 금수의 무리에 가까우리니, 어찌 난리가 아니겠는가. (5) 우리 도는 삼절운(三絶運)에 창립하였으므로 나라와 백성이 다 이 삼절운을 면치 못하리라(「개벽운수」).”

이 가운데 삼절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세 번의 큰 위기’를 겪어야만 새로운 세상(후천)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해월 선생이 제시한 이러한 세태는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연성을 나타낸 것이면서, (인류의 지혜와 용기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환을 성사시키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자 격려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어서 해월 선생은 우리가 이러한 고비를 성공적으로 넘어서면, 다음과 같은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만, 이 말씀을 ‘예언’으로만 읽는 것은 부족하다. 이는 스승님이 제자들에게 내리는 훈육의 말씀이며, 따라서 공부하고 닦아서 실천에 옮기라는 명령(가르침)이기도 하다. “(1) 우리 도는 우리나라에서 나서 장차 우리나라 운수를 좋게 할 것이라.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안에 영웅호걸이 많이 날 것이니, 세계 각국에 파송하여 활동하면 형상 있는 한울님이요, 사람 살리는 부처라는 칭송을 얻을 것이니라. (2) 우리 도인의 지금에 보는 정상으로는 보리밥에 거친 옷을 입고 도를 닦으나, 이다음에는 능히 높고 큰 집에 살면서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고 좋은 자리에 앉아서 도를 닦으리라. (3) 지금에 입도하는 사람들은 백지 한 권으로 예물을 드리나 일후에는 비단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지금은 도를 권하면 사람들이 다 믿지 아니하나 일후에는 사람들이 다 손바닥에 시천주 주문을 써 달라고 할 것이니라. 이때를 당하여 포덕사를 세계 각국에 파송하면 모든 나라가 자연히 천국이 되리라. (4) 우리나라의 영웅호걸은 인종의 종자니, 모두가 만국 포덕사로 나간 뒤에 제일 못난 이가 본국에 남아 있으리니, 지열자가 상재요 도통한 사람이니라. (5) 우리 도는 중국에 가서 포덕할 때가 되어야 포덕천하를 달성하리라. (6) (우리 도는) “산이 다 검게 변하고 길에 다 비단을 펼 때요, 만국과 교역할 때(현도가 될 것이)니라. … 때는 그 때가 있으니 마음을 급히 하지 말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오리니,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이니라(「개벽운수」).”

“살 것인가, 전환할 것인가”

󰡔전환이야기󰡕라는 책에서 주요섭은 ‘한국형 전환운동의 프로세스’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각비(覺非). ‘더 이상 이렇게는 아니다’라는 생명 감각. 둘째, 엑소더스(exdos, 歸). 기존의 질서로부터의 탈출, 혹은 생명의 근본 자리로 돌아감. 셋째, 깨달음. 이 세계는 살아 있는 전체, 혹은 ‘하나’라는 깨달음. 넷째, 새 공동체.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내용과 형태이 공동체. 다섯째, 체제 전환. 사회적 치유와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재구성.”

여기서 첫째 각비(覺非)란 본래 도연명의 시(<歸去來辭>)에 나오는 ‘자연과 더불어사는 지금이 바른 삶이요, 세파에 실려 흘러가는 어제의 삶이 잘못된 것이었네(覺今是而昨非)’라는 시 구절의 심정을 받아 ‘지금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 전환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앞에서 필자가 말한 바 ‘각자위심’이야말로 ‘잘못’의 진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둘째(歸)와 셋째(生命), 넷째(共同體)는 앞에서 말한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의미 그대로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전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의암 손병희 선생은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목격할 수 있는 계절의 순환에 따른 자연의 변화상에 빗대어 이렇게 경고한다. “무섭게 죽이는 가을바람이 쌀쌀하고 쓸쓸하게 서쪽으로부터 동쪽에 불어오니, 우거졌던 푸른 초목이 아무리 현재의 모양을 아직 보존하고 있지마는 하룻밤 지나면 산에 가득 차 누렇게 떨어지는 가련한 서리 맞은 잎뿐이리니, 이제 이 유형의 개벽을 당하여 정신상으로 무형의 개벽을 하지 않으면, 천하로 옷을 입고 우주로 집을 삼고 사해로 밭을 가는 그 사람이라도 한번 가지에서 떨어지면 문득 적막한 서리 맞은 잎과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사람과 물건이 개벽하는 때이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선천과 후천이 갈아드는 이 개벽의 운수에 전환을 성공하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는 말이다. 한 개인도 그러하고, 한 사회국가, 나아가 온 인류가 그러한 운명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지금의 지혜로운 사람들도 차츰차츰 말하기 시작했다.

해법은 무엇인가. 역시 의암 선생의 말씀이다. “(1)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니, 천지 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 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 지금에 그대들은 가히 하지 못할 일을 생각지 말고 먼저 각자가 본래 있는 정신을 개벽하면, 만사의 개벽은 그 다음 차례의 일이니라. (2) 정신을 개벽코자 하면 먼저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自尊心)을 모실 시(侍) 자로 개벽하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개벽코자 하면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疑懼心)을 정할 정(定) 자로 개벽하고, 의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개벽코자 하면 아득하고 망령된 생각(迷妄念)을 알 지(知) 자로 개벽하고, 아득하고 망령된 생각을 개벽코자 하면 먼저 육신 관념을 성령(性靈)으로 개벽하라(=以身換性; 필자 주).” 여기서 시정지(侍定知)는 동학의 핵심 요체인 21자 주문의 키워드이다(至氣今至願爲大 降 天主造化永世不忘萬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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